[2018, 스페인, 맑음] #1.Prologue

글 입력 2018.08.10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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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9. 대한민국. 소나기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당황스러운 하루였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살에 몸을 피하다 나오니 이번에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이리도 변덕스러운 날씨라니. 꼭 요즘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월 28일, 출국 날짜가 3주도 남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국일이지만 막상 한국을 떠나는 날이 다가오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 딱 오늘의 날씨 같았다. 언제나 화창한 스페인의 날씨, 조금만 걸어가면 펼쳐질 푸른 바다, 향긋한 과일과 싱싱한 해산물로 만들어진 음식들. 그러나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로부터 느낄 낯섦, 불안감, 그리고 그리울 나의 공간과 사람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다.


찰리채플린.jpg



교환학생.

많은 학생들의 꿈이자 로망이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 교환학생은 '도망'이었다.

오래된 영화 '모던 타임즈'을 보면, 주인공 찰리 채플린이 나사못을 조이는 반복 업무로 인해 일상생활 중에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이는 내용이 있다.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못을 조이며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빙글빙글 돌아가던 찰리의 모습이 어느 순간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라는 목표를 두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경쟁하던 10대를 지나 결국 대학교라는 목표에 올라섰을 때 느꼈던 허망함. 하지만 반복되는 수업과 공부, 경쟁에 무엇을 향해 가는지도 알지 못한 체 그저 해야 하니깐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내 모습은 딱 찰리 채플린이었다.


종종 공백 空白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 이기주 <언어의 온도> 中 -


스스로 멈추고 다시 나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 쉼표를 찍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당장 학교에 자퇴서를 내거나, 집을 뛰쳐나올 용기가 없었다.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소심하고 합법적인 도망이 바로 교환학생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정돈되고 안전한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가보고 싶었다. 수없이 오가서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닌, 다음엔 뭐가 나올지 모르기에 살피며 가야 하는 길을 가보고 싶었다. 이것이 언어도, 문화도, 그 무엇도 익숙하지 않았던 나라, 스페인을 선택한 이유였다. 물론, 안전하지만 갑갑했던 삶을 벗어나는 데에는 분명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 나가면 X고생이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교환학생 생활이 꿈꿔왔던 생활과 같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이전의 삶이 그리울 것도 같다.

하지만, 앞으로 스페인에서 마주할 수많은 일들과 나의 선택들이 미래에 좀 더 단단하고 반짝이는 나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에는 의심이 없기에 두렵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6개월의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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