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대간의 가치간 괴리 '낯선사람'

글 입력 2018.07.2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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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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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대로 얘기하면 '재미있는' 연극은 아니었다. 초반부터 잘 나오지 않는 캐릭터 설명(이름이라도), 장면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뜸은 있었지만 그것이 명확히 시간의 변화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든지, 의회단 사건에 대해서 먼저 찾아보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기 어렵다든지.

초반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초반에 "살려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나타난 소녀와 군인은 어쩌면 군인의 죄의식을 심화시키는 상황이었던 것일까? 사실 지금도 조금 아리송한 부분이다. 철학적이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추천할 만한 연극이라고는 할 수 있다.

연극은 의화단 운동 시절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의화단 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일제 강점기, 6.25전쟁에 대해서 배우듯 전쟁발단의 원인이나 시발점 등을 명확히 알 지 못하는 상태에서 연극을 보면, 누가 피해국이고 누가 가해국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바빠서 인물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사실 굳이 사전 지식으로 알지 않아도 연극을 보다보면 누가 피해국이고 누가 가해국인지 짐작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 짐작은 아마 확신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 의문이 들었다. 왜 가해자에게 연민의 여지를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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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연극에 대한 생각만 얘기한 것 같아 간단한 줄거리가 필요하단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천샤오보'는 젊은 시절 의화단과 오스트리아간의 전쟁 중, 의화단 쪽의 혁명단이었다. 그는 동포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했지만 오스트리아군에 잡히게 되고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 곳에서 오스트리아의 장교 '울리히'를 만나게 되었고, 울리히의 변덕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전쟁은 끝이 났고 할아버지가 된 천샤오보는 손녀 '바넷사 린'과 잠시 둘만 남게 된다. 바넷사 린은 성악가로 활동중이었고, 이번 공연에 그녀가 부르기로 한 오페라의 장면을 보고서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나는 이 연극의 주제가 '세대간의 가치관의 괴리'라고 생각한다. 작중에서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내용 상 비슷한) 이러한 말이 나온다. "너가 그토록 증오하던 오페라를 지금의 현 세대들은 즐겁게 누리고 있다." 주인공 천샤오보는 과거 의화단 운동에 참여함으로 인해 많은 전우들을 잃게 되었고, 전쟁에 대한 상처를 아주 오랫동안 지니고 있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아마 자신들의 동포를 학살했던 오스트리아, 더 나아가 유럽에 대해 분명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미 과거는 일어났던 일이고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그 일들은 그의 뇌리에 분명하게 박혀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를 겪지 않은 현 시대의 사람들은 타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문화를 즐겁게 누리고 다닌다. 어찌보면 마땅치 않아할 것이다. "우리를 괴롭게 했던 가해국들의 문화를 누리다니 어찌 그럴 수 있냐 말인가!" 지금 세대들이 보면 분명 꼰대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말을 하는 당사자의 시대와 그 시대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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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앞서 가해자에게 연민의 여지를 준다고 했었다. 천샤오보는 손녀가 공연하는 오페라의 한 장면을 보고 과거를 상기해 괴로워한다. 그에 반해 주인공과 대립인물이었던 울리히는 늙어서 요양병원에 지내게 되고, 끝내 자살을 하게 된다. 작중에서 그는 젊었을 적 한 소녀를 사살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어쩌면 연극은 전쟁이란, 누구 하나 잘 되는 것이 아닌 피해 밖에 남지 않는, 상처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될 것을 나타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주제에는 동감하지 않는다. 가해자는 뭐라 하여도 가해자이다.

연극의 내용과는 다소 안 맞지만 제대로 된 설명을 위해 하자면, 술을 먹고 한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 있다. 살해를 한 사람은 가해자, 죽은 사람은 피해자. 하지만 가해자가 술을 먹어 정상적인 행실이 불가능하다고, 사실은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하여도 그를 연민하고 풀어주어야 하는가? 그가 한 짓은 되돌릴 수 없는 명백한 가해 행위이다. 나는 그렇듯이 가해국의 가해자였던 '울리히'가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을 택하는 것은 정당한 행동이라고 보지 않는다. 현 시대 성범죄를 저지르고 그냥 자살해버린 이가 몇 명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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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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