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예술을 넘어선 전위 예술 그 자체, 역사와 예술의 경계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 전: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서’

글 입력 2014.07.1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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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에 앞서...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조르주 쇠라, 폴 세잔, 폴 고갱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

이름만 들어도 입이 쩍 벌어지는 혹은 미술에 관심없는 사람이더라도 알듯한
이들은 19세기 걸작품들을 만든 미술계의 거장들이다.
말을 조금 달리한다면, 예술의 황금시대 (golden age)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어떤 ‘주의(ism)’는 미술의 어떠한 한 가지 방향성을 표현할 때 쓰이지만,
이 시기는 다양한 사조의 등장으로 혼돈스럽지만
그렇기에 예술이 다원화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술의 발전이라는 공통된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대에 맞추어진 방향성은 각기 다르게 발전해 나아갔다.
 
예술은 자율적 현상이지만,
역사적/사회적으로 변화하는 제도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회학적인 관점에서는
인상주의의 시기란 아주 흥미로운 시대가 아닐 수 없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정이 수립되었고, 이어서 1952 제2제정이 수립되면서
파리는 조르주 외젠 오스망 (Georges-Eugène Haussmann) 남작의 주도 하에
프랑스 파리는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띄기 시작한다.
게다가 일본 문호개방으로 자포니즘이 유럽전역에 열풍 하기 시작하였고,
세계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1870년도에는 제3공화정이 수립되었으며 1889년에는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에펠탑이 건설되었다.
1895년은 최초의 ‘영화’가 상영되었고 1914년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나열하기 입 아플 정도로 핵심적 사건이 연달았던 시기에 살던 예술가들은
그들의 시대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그 격동적인 변화 가운데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는 <오르세 미술관 展,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서>는
파리예술계의 급격한 변화의 시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화가들은 야외에서 실제 주제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밝은 색채를 사용하며, 근대 삶의 주제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대의 격동과 변화 그리고 색채의 미학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전시가 될 것이다.
 
 
 
인상주의, Impressionism
 
 
1850년대에 이르자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이래 지배적 전통 예술인
아카데미 주제 (예를 들어 도덕심과 같은) 에서 벗어나 당시 파리의 도시생활을 찬미하며
일상, 가사, 풍경에 집중하여 독자적인 주제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빛이 사물 그리고 환경에 주는 효과를 그렸다.
눈에 보이는 원색 붓놀림으로 파리 주변의 일상생활을 그리곤 했다.
사실 인상주의에서는 주제의 속성보다는 그리는 방식이 더 중요해진 점이 포인트이다.
빛에 따른 사물 혹은 인물에게 비추어지는 명암과 색의 변화에 초점으로 외광이 주는
순간적인 느낌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초반에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의 기원을 따져보자면 3가지로 비롯되었다고 크게 이야기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전통적 정규적 아카데미 관습에 위배되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사실주의라고 하면 밀레의 <임종>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전원의 풍경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은 현실도피적 분위기를 이끈다.)
그로인해 기존의 역사,종교,신화적인 예술의 흐름에 위배되는 주제를 띄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일본 판화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밝은 원색을 사용하고
평면적으로 인물을 표현하고 원근법을 거부하는 대담성과 단순함은
인상주의 작가들에게 사실주의와 함께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으론 사진술의 발전 (실제로 1878년 머이 브릿지는 1/2000초의 속도로 촬영할 수 있는 장치를 제작하였으며 1888년엔 미국 이스트먼사가 코닥 카메라 롤필름을 발명했다.)
더 이상 미술품이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을 복사하는 것에 머무를 필요성을 삭제시켰다.
이런 기술의 진보 역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예술가가 대중과 전문가 그리고 국가에 화가로써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살롱전에 참가가 유일무이했다.
하지만 인상주의 작가들은 콧대높은 살롱전의 혹평 속에서 참여를 계속 거절당했고,
1874년 클로드 모네, 피사로, 시슬레, 드가 등 30여명의 인상주의 작가들이
사진사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심사위원과 수상이 없는 자신들만의 자유 전시회를 개최하여
165점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후 8차례정도 계속 전시를 진행하면서 인상주의에서 성공하는 화가가 등장하기도 시작하며
 폴 고갱을 비롯하여 새로운 인물이 참여하기도 시작한다.
 
 
 
[클로드 모네, (1840 ~ 1926) ]

“화가는 훌륭한 장인이 되는 걸로 부족하다. 자신의 캔버스를 어루만지길 좋아해야 한다.”
클로드 모네

 
클로드모네_양산을쓴여인.JPG
<양산을 쓴 여인>, 클로드 모네 ,1886

클로드 모네는 대표적인 빛을 표현한 외광회화 작가이다.
그는 그리고자 하는 것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묘사하여 빛이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느낌을 묘사하는 데에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한다.
색감과 형태가 무너진 가운데 느껴지는 은은한 선은 백일몽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작품 속 여인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의 딸 수잔 오셰데이)은 마치 불쑥 튀어나와 움직일 것만 같다.
그리고 그녀의 날리는 스카프와 구름은 마치 내가 산책 중 바람에 휘감기게 된 듯한 환상에 빠지게 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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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스 베르넹 젠 부인과 아들 앙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910
 

그림을 그리는 것을 무척 사랑한 르누아르를 떠올리면 그가 사람을 바라보는
특히 여인을 바라보는 따스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에게 주목해야할 점은 빛과 색채의 미학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한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는데,
모델을 피부들을 바라보면 그 당시 부패된 살의 색깔이라고 알려진 초록, 자줏빛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관람객들은 그 컬러들의 조화를 통해 부패된 살이라는 감정보다는 모델에게
생동감과 빛에 투영된 여인의 모습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된다.
반대로 이 위의 <조스 베르넹 젠 부인과 아들 앙리>의 작품의 경우
검은색과 붉은색의 제한적인 색조로 채색하고 있음에도
표현하고자한 모자의 호사스러움이 절실히 들어난다.
 
 
[카미유 피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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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의 보이엘디유 다리>, 카미유 피사로,1896
 
 
카미유 피사로는 모든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화가로써
그는 도심지의 매력과 산업 풍경에서 느껴지는 매력이 잘 결합된 도시를 작품속에 적극 반영하였다.
그의 붓터치는 전방향으로 매우 자유롭게 표현된다. 
카미유 피사로는 유명한 인상주의 대표화가는 아니지만,
당시 변화하는 산업화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 빠른 터치로 표현한 작가로써,
 
개인적으로는 시기는 조금 이후이지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연상되었다.
작품 속 캔버스를 대각선으로 활기차게 가로지르는 다리가 대도시의
부르주아계층과 노동자들의 연결고리점과 같은 산업화에 따른 또다른 계급간을 느끼게도 하는 것 같다.
 
 
 
[신/후기 인상주의, Neo-Postimpressionism]
 
1880년부터 1910년을 가리키는 신인상주의는 미술개혁 30년을 의미한다.
외광에만 집중했던 선배 인상주의를 비판하며 색,붓터치,내용을 생각과 감정을 담아
더욱 강하게 표현하려하였다. 대표적인 신인상주의 작가인 오딜롱르동과 조르주쇠라는
독립예술가그룹(Group des artises independants)를 결성하여
이성적이면서 과학적인 인상주의를 표현하기도 했었다.
대체적으로 이들은 상징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는데, 더욱 단순하고 진정한 재현 방식을 위하여
기하학적 형태를 강조하거나 형태를 왜곡하고 부자연스러운 색을 가미하여 그림을 재창조하는 시도를 하였다.
신인상주의의 대표 작가는 조르주 쇠라로 분할기법이라고도 불리는 점묘주의가 그 예이다.
그는 작품에서 질서정연한 측면을 추구하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빛과 색채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후기인상주의의 대표 작가는 폴 고갱으로 자연주의를 버리고
색과 선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면서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였고
이후 파리에 나비파 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조르주 쇠라]
 
그는 보색의 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작은 원색 점의 과장된 대비가 감상자 눈에서 생성되어
혼합되도록 하는 원리가 적용된 그림을 그렸다.
그는 한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무수한 습작을 그렸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경우 최종 작품을 위해
28점의 드로잉,28점의 유화 패널 스케치와 3점의 대형 캔버스 등으로 예비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림을 그릴 때 개개인보다 여러사회 계층의 유형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번 전시에는 <포르 탕 베생 항구>가 전시된다.
 
 
[폴 시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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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무렵의 아비뇽>,폴 시냐크, 1909
 
 
전통적인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조르주 쇠라의 분할기법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폴 시냐크의 유명작인 교황청 시리즈에서
<저녁 무렵의 아비뇽(아비뇽 교황청)>이 전시 된다.
따뜻한 석양의 인상을 그려내어 저물어가는 태양빛이 성벽을 붉게 물들이는 장면을 표현했으며,
따뜻한 색조로 성벽의 색을 분산시켜 표현하였다.
성벽의 색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수풀의 어두운 색과 대비를 이루며 전경에서
론 강 표면에 비치는 분홍빛 구름으로 연장된다.
따뜻한 색조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쓸쓸함이 표현되는 듯 한 이 작품은
어쩌면 따사로이 표현한 성당을 수풀과 대비시켜 당시의 시대를 풍자하려는 노력은 아니었을까
하고 감히 생각해본다.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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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건초더미>,폴 고갱, 1889
 
 
그는 외광에 집중한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내면을 표현하려고 했던 작가이다.
그렇기 사후가 돼서야 유명해진 작가로, 두 번째로 퐁타방에 체류하던 시기에
형태가 단순하고 색이 임의적이며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종합주의라는 이론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브르타뉴를 찾았을 때 그린 작품으로 시골스러운 느낌 그대로의 사람들과 옷차림이
그의 관심을 끌었고 이 작품은 그가 윤곽을 잡기 위해 애쓴 종합주의의 초기작중 하나이다.
 
[빈센트 반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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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외젠 보흐>,1888, 빈센트 반고흐
 
 
반고흐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작가이다.
그는 화가의 환영적 시각을 작품에 반영하였다.
불안정한 원근법, 색과 검은 윤곽선 등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외젠 보흐는 벨기에 출신의 화가로 그의 특이한 외모는 반 고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원대한 꿈을 꾸는 한 친구 화가의 초상화를 그려볼까 해.
이 친구는 꾀꼬리가 노래하듯 그림을 그리는데 그 친구 기질이 그래.
머리는 금발이고 그림에는 내가 이 친구에 대해 갖고 잇는 애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
라고 하며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비파,The Nabis]
 
Nabis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뜻이다.
상징주의와 폴 고갱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예술기법을 창조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작가들의 우정으로 엮인 집단으로 1880년대 말에 등장하게 되었다.
단순하고 주관적인 예술관으로 이들을 통해 순수미술과 장식미술 사이 경계가 허물어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기존의 외광회화에 치우쳤던 인상주의 화가들을 비판하는데,
대표적인 나비파 이론가인 모리스 드니는 외광회화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예술은 더 이상 우리가 눈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에만 호소하지 않으며,
아무리 세련되게 표현되었다하더라도 자연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기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정신력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며 자연은 그저 그 계기가 될 뿐”

나비파는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현실이 아닌 상상을 바탕으로 한 대안적인 예술관이라고 볼 수 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은 연극무대세트,포스터,태피스트리 디자인등 모든 형식의 예술을 포용하였다.
1903년 나비파를 후원해온 <라르뷔 블랑슈 (La Revue Blache)>가 폐간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하게 되었다.
 
 
COMMENT:

인상주의 화가들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술’의 개념을 형성한 주인공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전의 예술이라는 개념은 ‘솜씨, 기술’의 개념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말처럼 좋은 작품을 그리는 화가는 그저 훌륭한 장인에 그쳤을 뿐이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와 같은 전위세력들은 예술을 어떠한 담론을 가지고 있는 신성시한 존재로 예술 그자체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더 이상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특수한 재능을 가진 자들의 작품이 된 것이다. 실제로 영어에서는 Art 보다 Fine art 라는 단어가, 독일어에서는 쿤스트 Kunst에서 쇠네 쿤스트 Schone Kunst로, 불어에서는 Arts 가 보자르 Beaux arts 와 같은 새로운 개념의 예술을 설명하는 단어가 등장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이 인상주의 화가들은 예술이라는 개념과 그 격을 높인데 에 공헌한 점은 무수히 많다. 이 가운데 현재 21세기의 우리시대는 예술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기도 하고 신성한 작품이기도 한 것을 보면 세기 별로 예술 세계(art world)의 범위는 점차 광범위해지는 것 같다. 19세기부터 20세기가 이끌어온 이 예술의 물결을 새롭게 도전하여 변모하고 있는 21세기 예술. 과거와 달리 우리 시대는 더 이상 그동안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진정한 전위세력들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예술은 끊임없이 아방가르드(avan-garde)가 등장하고 있다. 어쩌면 대중예술이라는 것 자체도 그러한 방향 중 하나가 아닐까. 인상주의 작품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사뭇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시기는 ‘역사’가 ‘예술’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시기이자, ‘예술’이 ‘역사’의 흐름을 표현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그들만의 아우라(aura)가 가장 많이 묘사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는 <오르세 전,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19세기의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의 아우라를 가득 느끼기 위한 좋은 전시가 될 것이다.
 
 
 
*관람정보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기간: 2014.05.03 ~08.31
관람시간 : 화,목,금 09:00 -18:00
           수,토 09:00 - 21:00
           일,공휴일 09:00 - 19:00
           월요일 휴관
관람권 발급시간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관람료 : 일반 12,000원 / 중고등학생 10,000원 / 초등학생 8,000원 / 유아 5,000원 / 65세 이상 6,000원
 
 
 
 
 
 
작성
이예지(persona0111.blog.me)
참고
동굴벽화에서 뉴미디어까지 세계 미술의 역사, 시공아트
국립중앙박물관
[이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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