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금호아트홀, 이넌 바르나탄 Piano

글 입력 2018.07.06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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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관람하고 나면 으레 한 가지 정도, 많게는 몇 개의 멜로디가 머릿속을 맴돈다. 대중음악이 아닌 클래식 공연도 예외는 아닌지라 유독 귀에 꽂히는 주선율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같은 곡을 반복 청취하며 음을 되새기는 편이지만 이번 연주회는 사뭇 달랐다. 스스로도 놀라우리만치 정확히 떠오르는 멜로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연주곡이 울려 퍼지던 당시의 분위기와 감정만이 뚜렷한 잔상으로 남을 뿐이었다. 즉, 나에게는 인상주의 음악이 가진 고유의 특성(색채감 표현, 암시와 상징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한 날이 되었다.





Program

클로드 드뷔시 피아노를 위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L.82
Claude Debussy Suite Bergamasque for Piano, L.82
Prélude. Moderato (Tempo rubato)
Menuet. Andantino
Clair de lune. Andante très expressif
Passepied. Allegretto ma non troppo

토마스 아데 피아노를 위한 보이는 어둠
Thomas Adès Darknesse Visible for Piano

모리스 라벨 피아노를 위한 밤의 가스파르, M.55
Maurice Ravel Gaspard de la nuit for Piano, M.55
Ondine
Le gibet
Scarbo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피아노를 위한 전람회의 그림
Modest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for Piano
Promenade
The Gnome[Gnomus]
Promenade
The Old Castle[Il vecchio castello]
Promenade
Dispute between children at play[Tuileries]
The Ox-Cart[Bydlo]
Promenade
Ballet of the unhatched chicks
Samuel Goldenberg and Schmuyle
Promenade
The Market at Limoges[Limoges, le marché]
The Catacombs[Sepulchrum Romanum]
Cum mortuis in lingua mortua
Baba-Yaga[La cabane sur des pattes de poules]
The Great Gate of Kiev





1부의 여정은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에서부터 시작됐다. 템포 루바토로 연주자에게 자유로운 박자를 허락하는 1악장의 프렐류드는 전주부터가 황홀한 한숨을 내쉴 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이었다. 그 날 오후에 내린 빗줄기로 촉촉했던 땅과 옅은 빗방울을 절로 연상케 했다. 질척거리지 않고 딱 기분 좋을 만큼의 청량함을 안겨준 후 이어지던 미뉴에트-달빛-파스피에의 완벽한 흐름은 몽환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음색으로 나를 취하게 했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임을 과시하듯이 자연과 추상적인 표현들로 가득했다.
  
부드럽지만 빗방울이 창문과 마찰을 빚을 때처럼 음표 하나하나가 명료하게 톡톡거리던 드뷔시의 곡과 달리 토마스 아데의 Darknesse Visible은 역시나 제목처럼 어두웠다. 화음을 규칙적으로 빠르게 되풀이하는 주법인 트레몰로는 유령 같지만 예상보다 훨씬 선명한 선율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위를 쿵쿵 한 번씩 강렬하게 내짖던 음들은 공포영화의 클리셰처럼 급작스러우나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종잡을 수 없던 곡의 마무리는 처음과 반대로 미세히 떨리던 음들이 순식간에 잦아들면서 끝이 난다.

뒤이어 1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는 이넌 바르나탄의 섬세한 해석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클래식은 복잡한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고 연주시간 또한 길다보니 연주회를 가기 전에 두어번쯤은 미리 듣는 것이 나의 클래식 감상 방법이다. 새로운 곡에 관한 낯설음을 예방하는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이넌 바르나탄은 전혀 다른 곡을 듣고 있단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독특한 감성을 담아냈다.

1악장인 물의 요정 옹딘은 이토록 음산한 색깔을 지닌 곡이었나 계속 되뇌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청아함과 동시에 기이하도록 스산한 분위기는 미치 커다란 나무와 풀꽃으로 둘러쌓여 더욱 푸르게 보이는 호숫가에 홀로 앉아 있는 듯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2악장인 교수대에서는 느릿느릿 여유롭게 흘러가는 멜로디가 폭발 직전의 고요함과 불안함을 표현하여 한층 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음색을 자아냈다. 마지막 3악장인 스카르보는 1악장과 2악장에서 숨겨두었던 맹렬함을 떨치듯이 숨가쁘게 질주했다. 피아노 역사상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곡을 완벽한 테크닉으로 선보인 경이로움에 입이 벌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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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연주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르그스키가 친구인 하르트만의 추모 전시회에서 받은 인상을 피아노로 묘사한 작품이다. 각기 다른 10곡으로 이루어진 작품 사이에는 이들을 한곡처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는 프롬나드가 존재한다. 산책이란 뜻을 지닌 프롬나드는 관찰자가 그림에서 그림으로 이동하는 듯한 작용을 하도록 한다.

1곡인 프롬나드부터 4곡 고성(The old castle)까지의 흐름과 감정표현이 특히 좋았는데 첫 프롬나드는 호기롭게 발걸음을 내딛는 형상을 자아내지만 다음 곡인 난쟁이에서는 분위기가 급변하여 음의 높낮이가 히스테리컬하게 오르내린다. 그 뒤를 우아하고 나직한 음성의 프롬나드가 이어주고 4곡에서는 음표들이 비탄에 잠겨 노래하듯 천천히 공연장을 가득 매웠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내가 한 일은 그저 정신없이 폭발하고 뒤바뀌는 색채의 물결에 몸을 맡기면 되는 것이었다. 곡마다 요구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그가 철저한 완급조절과 순식간에 몰입하는 집중력으로 소화해내는 것을 보고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준비된 프로그램을 마친 후 그는 바흐의 Sheep May Safely Graze(양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고)와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소나타 7번이라는 두 곡의 앵콜곡을 선물해주었다. 바흐의 곡에선 아름답고 평온하지만 애수가 담긴 선율을, 프로코피에프의 곡에선 피아노 줄이 끊어지지 않을까 우려 될만큼 가장 격렬한 파워로 흉포스러운 연주를 선보였다. 전쟁으로 인해 겪는 고통과, 파괴된 인간성, 분열된 정신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작품다웠다.
  
단 한곡이었으나 앵콜곡으로 선보인 바흐의 작품을 통해 이넌 바르나탄이 근현대음악에만 특화된 재능을 지닌 아티스트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바로크 음악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 아우르는 그의 노련한 기술과 풍부하고 깊은 표현력으로 인해 클래식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더 상승했음을 느낀다. 그러나 주제를 조금 바꿔 이야기해보자면, 클래식을 알면 알수록 작품의 배경과 내면에 담긴 남성중심 세계관도 함께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물의 요정이 남성에게 사랑의 고백을 거절당한 후 사라지는 시에서 영감을 얻은 부분이나 마녀를 추하고 늙은 여성으로 묘사한 작품이 음악으로 표현된 부분을 볼 때, 제 아무리 기존의 규칙을 벗어나 새로운 사조를 창조해낸 남성 예술가라도 male gaze(남성적 시선)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이제 나에게 예술 작품과 여성혐오는 반으로 분리해 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과거처럼 순수하게 예술을 즐기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도 어찌하랴. 퇴보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사유하는 요즘이다.
 

[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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