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풍금이 있던 자리_신경숙 [문학]

글 입력 2018.06.23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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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이 있던 자리 _신경숙


얼마 전 비가 왔다. 그다지 큰 비는 아니었다. 잠을 못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자연스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 그날의 새벽 빗소리가 떠오른다. 가만가만 속삭이는 '나'의 편지는 조용하고 서글프며 아름답다.

‘나’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쓰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편지는 '사랑하는 당신'에게만 털어놓는 ‘나’의 사랑이다. 그러나 '나'가 이 사랑의 편지를 당신에게 전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사랑은 떳떳하지 못하기에 당신에게 전해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편지는 '나'가 감정의 치받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나'는 어지러운 마음의 파문을, 전해주지 못할 편지에만 털어놓는다.

표면적으로 단순하게 ‘당신’과 ‘나’에 대해 말하자면 ‘남녀 간의 어지러운 정’을 쌓은 불륜관계이다. '당신'과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른 고향에서 '나'는 점촌댁과 어머니를 마주한다. 두 여인은 남편의 불륜으로 인해 밀려난 아내들이다. ‘나’는 아버지와 점촌댁의 남편이 어떻게 그들의 아내를 밀어내고 다른 여자를 사랑했는지 보아왔다.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마주하는 사람과 장소들은 당신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생각에 자꾸만 파문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그 여자’를 떠올리게 된다.

첫째 오빠는 ‘그 여자’를 ‘악마’라 부른다. 그러나 ‘그 여자’는 첫째 오빠의 으름장처럼, 또는  막장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연녀들처럼 표독스럽고 지독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 여자’는 너무나 아름답고도 연약한 존재이다. 미리 불려놓은 보리밥만 지어주던 어머니와는 달리 고슬고슬한 보리밥을, 어느 날은 수수밥을, 또 어느 날은 만두를 빚어 만둣국을 내어주는 존재이며, 막내동생의 아기그네에 깔린 낡은 내복을 병아리색 이불보로 바꾸어 놓는 여자이다.

무엇보다 가족 모두가 내버려둔 막내딸인 어린 시절의 ‘나’를 알아보고 이해해주는 존재였다. 이렇게 그 여자가 집에 머무른 열흘이 아버지의 가장 환한 시절이었으며, 가족들도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아주 닮아있다. 우리는 그녀와 ‘나’가 동류의 인간임을 소설 전체에서 느낄 수 있다. ‘나’ 또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눈 먼 송아지를 돌보는 존재이다. 또한 이런 깊은 감성의 편지를 쓴다는 것 자체가 ‘나’가 어떠한 인물임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소설전체에서 ‘나’는 기억 속 ‘그 여자’를 떠올리고, 동경하고, 연민을 느끼는데, 아마 그 이유는 자신을 ‘그 여자’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말하면 불륜이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단순한 명제는 아닌 듯싶다. 우리는 ‘나’와 ‘그녀가’ 아름다운 이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신과 아버지가 왜 ‘나’와 ‘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녀들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나’와 ‘그 여자’는 결국 사랑에 실패한다. 그 원인은 본처의 발악이라든가, 주변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와 그 가족이 가진 ‘익숙한 시간들’에 결국 지고 마는 것이다. 어머니가 막내 동생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보고 떠나는 ‘그 여자’와 사랑하는 당신의 딸인 ‘은서’의 이름을 듣고 그만 수화기를 놓아버리는 ‘나’를, 그저 비난할 수만은 없었다.


[김새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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