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추와 얼얼함 [기타]

아빠
글 입력 2018.06.1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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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여름이면 우릴 불렀다. 짜증도, 사춘기도 흔한 시골 가부장을 이기진 못했다. 터벅터벅 억지로 걸음을 떼면 아빠는 목장갑, 호미, 양동이 따위를 줬다. 그러면 우린 밭으로 올라갔다.

우린 선선하면 고춧대를 박았고 더우면 물을 옮겼으며 고추가 익으면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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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녹슨 고철 막대를 땅에다 박는다. 홈을 파서 자리를 만든다. 팔이 저릿했다. 땅이 고통스러워하는 건지, 진동이 막대를 넘어 전해온다. 부르르. 목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차가움이 소름끼쳤다. 녹 부스러기가 목장갑에 엉겨 붙을 때면 어서 빨리 그걸 떼어버리고자 난리였다. 곧 다시 붙었지만.
 
흰 양동이는 한 번도 깨끗한 적이 없었다. 흙이든 뭐든 항상 얼룩이 묻어있었다. 양동이를 볼 때면 꼭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거뭇한 피부 시골 소년. 양동이에 물을 채운다. 물이 차오르면 숨어 있던 흙먼지와 벌레 사체 같은 것들이 둥둥 떠오른다. 물방울이 아우성치고 손에 다닥다닥 달라붙고. 그렇게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나면 호스가 닿지 않지 않는 곳까지 끙끙대며 올라간다. 양동이를 들고 경사진 밭을 바라볼 때면 아득하다.

꾸역꾸역 올라가고 지칠 때면 잠깐 내려놓고 쉬었다가 괜찮아지면 다시 올라갔다. 한발 두발 올라갈 때마다 물은 그네타듯 한 번은 왼쪽으로 한번은 반대편으로 번갈아 그네를 탔다. 가끔 호기심 넘치는 아이들은 양동이를 넘어 바지를 적셨다. 축축함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젖은 바지에 흙이 묻을 때면 불쾌함도 같이 엉겨붙었다. 도착했을 땐 물은 반도 남지 않았고 아껴가며 조르륵 고추에 줬다. 징글징글한 흙은 내려올 때 털면 올라갈 때 묻었다. 몇 번을 강박적으로 털고 난 후, 포기해버렸다. 끙끙대며 물을 다 줬을 때 장갑을 벗으면 손에 가로로 몇 줄 자국이 남았다. 바지는 여전히 젖어서 흙먼지가 엉겨 붙어있었다.
 
고추는 수확할 때조차 고추였다. 아토피가 있는 사람에게, 아니 그냥 아토피에게 땀이란 최악이었다. 고추는 늘 땀과 함께였고 날 괴롭혔다. 농약 뿌린 고추를 만진 손으로 아토피 부위를 긁을 수도 없었다. 사실 아토피 부위와 닿지 않아도 독한 농약은 목장갑을 뚫고 들어왔다. 고추를 다 따고 와서 씻으면 손이 벌겋게 올라왔다. 간헐적으로 그걸 긁었다. 언제나 있지도 않은 가려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뼈가 간지러운 기분. 밥 먹을 때면 엄마는 그것을 한참 바라봤고 아빠는 수저를 떴다. 내겐 두 모습 다 상처였다.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아빠는 우릴 불렀다. 우리는 평소대로 나갔고 돌아온 건 호미 따위가 아니라 따라오라는 소리였다. 밭 귀퉁이에 사과나무 세 그루가 심어져있었다. 기실 너무 좁은 터라 열매는커녕 다 자라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우린 무척 좋아했다. 지긋지긋한 밭에서 그것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어서 매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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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에 집중하느라 사과나무를 잊었다. 아빠도 더 이상 우릴 부르지 않았다. 잊었던 사과나무가 생각나 밭에 가봤을 땐, 여전히 왜소한 사과나무는 앙증맞게도 자그마한 사과 하나를 맺어 올렸다. 나는 홀린 듯, 익지도 않은 사과를 따 먹었다. 썼다.
 
시간이 흘렀지만 고추는 지금도 싫다. 음식을 씹다가 고추를 씹을 때면 얼얼함과 함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그렇다고 고추가 맛있어지지도 그 시절이 그리워지지도 않았다. 다만 고추에서 쓴맛이 났다.


[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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