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전쟁의 포탄 속에서도 오케스트라는 불을 지폈다,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글 입력 2018.05.30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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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전쟁의 포탄 속에서도
오케스트라는 불을 지폈다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만약 당신이 예술가를 꿈꾼 적이 있었다면, 한번쯤 '예술이 밥을 먹여주나'라는 관용문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렸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건 모든 예술가의 자아 속에서 메아리치는 말이다. 최소한 필자가 그랬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까지 쭉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물 밀듯이 들어와 온 정신과 육체를 뒤덮는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든 표출하기 위해서 시작한 그림이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사회적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감수성은 언론의 역할보다 더 강력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림을 계속 그려가면서 얼마지나지 않아 이것이 정말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필자는 작은 캔퍼스에 그린 그림이 사회를 바꾸는 정책이나 영향력보다 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정도로 예술은 정말 누군가의 배를 채워주지 않았다. 필자가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부조리한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주린 배를 움켜진 사람들의 앞에서 그 누가 예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꽤 많은 문화예술 작품을 감상했다고 자부하는 지금도, 이런 인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 예술은 그 누구의 배도 채워주지 않는다. 수많은 음표와 아름다운 색채, 몸짓은 우리의 몸 안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예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었다. 물론 예술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의 배가 아니라 정신의 배를 채운다.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시되는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종종 착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사람의 삶은 먹은 음식의 무게와 내뱉는 숨으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삶의 무게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의해 측정된다. 우리의 영혼이 가치 있는 이유도 이 비참한 세상 속에서도 개개인이 가슴 속에 품은 정신의 나침반의 치침 끝이 희망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문제로 팽팽 돌아가는 치침을 예술은 그 숭고한 정신을 향해 가리키게 돕는다.

 그 정신이 갖는 힘은 때로 몸 속에서 음식을 태우는 힘보다 강렬한 마음의 불꽃이 튄다. 예술을 가슴에 품은 인간에게는 무한한 마력이 있다. 그 마법은 개개인의 경험에도 존재하지만, 역사에도 존재한다. 수많은 역사의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누군가 하나의 사건만 소개해달라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없이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의 초연을 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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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엘리아스베르크가
<레닌그라드> 교향곡 초연에서
지치고 굶주린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사진


 1941년 9월,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국방군이 쇼스타코비치가 나고 자란 도시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서양 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파괴적인 포위전의 시작이었다. 2년 반 동안 폭격과 굶주림과 추위로 100만 명 넘는 시민들이 죽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전쟁의 공포 속에 잠겨 레닌그라드에서 음악을 작곡할 때 사람들은 다락방에서 찾아낸 자신의 고양이와 강아지를 먹었다. 거리의 시체가 그대로 얼어붙어 죽으면 그 시체의 옷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나 둘 벗겨서 가져갔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화도시였던 레닌그라드에는 한때 음악이 끊이질 않았지만, 당시 레닌그라드는 음악 대신 침묵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음악을 즐기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상황이었다.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라디오 오케스트라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마지막 생방송은 1942년 새해 첫날 <눈 아가씨>의 오페라 발췌곡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테너를 노래했던 가수는 얼마 뒤에 굶주림으로 죽었다. 오케스트라 일지의 마지막 장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리허설이 열리지 않았다. 스라비안이 죽었다. 페트로프가 아프다. 보리셰프가 죽었다. 오케스트라가 돌아가지 않는다." 도시는 굶주림으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3월 레닌가르드 공산당 총수는 죽어가는 도시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총수는 레닌그라드의 모든 음악가들이 라디오 위원회에 보고하라는 포스터를 도시 곳곳에 붙였다. 지휘자 카를 엘리아스베르크가 자신의 음악가들 중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지 집을 방문했지만, 대부분 어두컴컴한 아파트에 수척하게 누워있었고, 본인도 굶주림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몸을 가눌 수 있는 음악가들을 모았지만, 15명이 전부였다. 모든 음악가들이 섵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춥고 기력이 없었다. 오보에 주자 마투스는 수척하게 팔을 드는 카를 엘리아스베르크를 이렇게 기억했다."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가 날개를 다친 상처 입은 새이고 곧 추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추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상대로 오케스트라는 끔찍했다. 관현악 주자들은 숨을 불어넣지 못했고, 피아니스트는 손가락이 얼어붙지 않도록 벽돌을 데워 건반 한쪽에 놓고 연주했다.

 레닌그라드의 열 다섯 단원들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기에 도시 근방의 붉은 군대 연대에서 관악기 연주자들을 차출해냈다. 리허설 홀까지 걸어갈 힘도 없었던 엘리아스베르크는 시체처럼 썰매로 끌고오곤 했다. 음악가들에게 식사가 제공되긴 했지만, 콩 몇개에 물을 많이 붓고 엿기름 한 숟가락을 넣은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연주자들이 때로는 자리에서 털썩 넘어지거나 정신을 잃었다. 레닌그라드가 해방을 맞고 봄이 와 초록색 새싹들이 나기 시작했지만 오케스트라 단원 중 그 누구도 희망적이지 않았다. 봄으로 올라온 싹들을 뜯어먹기 위해 주부, 학생, 교수, 의사 할 것없이 사람들은 네발로 기어다니며 야생토끼처럼 풀을 뜯어먹었고, 시체가 여전히 쓰레기통을 나뒹굴고 있었다. 봄이 되어 드러난 젖가슴이 달린 여자 시체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잘라갔다. 오케스트라가 본격적으로 연주되기도 전에 단원 셋이 죽었다.

 그리고 1942년 8월 9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이 처음 연주되었다. 일년전 히틀러가 아스토리아 호텔 무도회장에서 축배를 들겠다고 떠벌린 날이었다. 대중들은 몇키로 밖에 있는 독일군들을 잊기 위해 교향곡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입장권을 샀다. 오케스트라 연주들이 악기를 조율하고 청중들이 강당으로 모여들 때 공연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 소련의 붉은 군대는 3000개의 고성능 폭탄을 퍼부었다. 그 결과 레닌그라드의 거리에는 단 하나의 포탄도 터지지 않았다. 음악가들은 그제서야 흥분하기 시작했다. 마투스는 "봉쇄 이후 처음으로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곡을 듣기 위해 먹을 것을 포기하고 버틴 수백명의 사람들이 연주회장을 찾고, 전선에서 곧장 온 군인들도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자동화기가 있었다. 청중 석에는 후에 유명한 지휘자가 되어 이 곡을 직접 지휘하게 될 11살의 유리 아로노비치도 있었다.

 연주는 공연장뿐만 아니라 도시 거리, 운하 너머, 모래주머니를 쌓아놓은 궁전 멀리, 독일 병사들의 적진까지 들리도록 설치한 스피커에게까지 널러 퍼졌다. 레닌그라드의 전체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을 들었다. 레닌그라드 주민들은 그 날의 경험을 잊지 못했다. 미국인들에게는 강력한 연대감과 우정이, 러시아인에게는 승리의 희망을 꿈꾸게 했다. 일부 독일인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성찰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클라리넷 주자 코즐로프는 레닌그라드의 비극을 담은 영상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매일 저것과 함께 살았어요! 리허설을 하러 가는 길에 매일 저런 장면을 보았지요. 하아. 하지만 공연은, 그 것은 고통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얼마나 보았는지 몰라요. 지금도 우레 같은 청중의 박수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죽으면 이 이미지가 마지막으로 내 눈앞에 떠오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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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반항과 순응이 뒤섞인 인물이었다. 지휘자 쿠르트 잔덜링의 말을 들어보자. “그도 인간일 뿐이었어요. 자신의 문제일 때는 겁쟁이였지만 다른 사람이 관계되는 일에는 무척 용감하게 나섰습니다.” NKVD가 그에게 접근하여 춤곡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을 때 아마도 그는 “거부하기에는 너무 무서웠으리라.” 안전하게 지내는 우리가, 살해하려는 요원들의 감시를 받는 가족이 없는 우리가, 투옥된 친척들의 목숨이 우리 행동거지에 달려 있지 않은 우리가 그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_본문 461쪽


 책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이 역사적 사건의 발단이 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탄생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따라감으로서 이야기한다. 소설가이자 고전음악 칼럼니스트인 저자의 해박함과 치밀한 조사, 유려한 문체가 '쇼스타코비치'의 이야기를 독자의 이야기로 만든다. 방대하다면 방대한 545페이지를 넘기며, 독자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글을 읽어가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여러 면모를 얼굴에 씌워볼 수 있다. 거기에는 수많은 얼굴이 존재한다. 책에는 섬세한 남자아이였던 어린 미챠, 사랑에 빠진 청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작곡가, 끔찍한 전쟁 통에서도 끈질기게 작곡을했던 예술가가 책에 한데 섞여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긴 인생사를 따라가다가 마침내 마주한 교향곡 7번의 묘사는 가히 이 책의 피날레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은 교향곡 7번이 초연되는 순간 함께 숨을 멈추고 음악을 듣게된다.

 영광스러운 역사의 장면을 장식한 쇼스타코비치지만, 그는 사실 살면서 온갖 오명에 시달렸다. 그는 실로 쇼스타코비치는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했다. 사실 레닌그라드를 망친 것은 히틀러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다. 끔찍한 공포 정치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었다. 레닌그라드의 애국심과 뜨거운 감정은 스탈린을 향한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무엇이었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당에서 그의 이름을 빌려 쓴 기사에 서명하라는 요청을 받고 저항하지 않았다. 말년의 그는 그 스스로가 비겁한 사람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가 충성스러운 스탈린주의자였나 멸시하는 반체제 인사였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가 연민을 베푼 것은 분명 해보인다. 그는 사실 여유가 된다면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이용하여 친구들을 도우려 항상 애썼다. 그는 정부에 많은 탄원서를 보냈지만, 더이상 정부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 였고, 처형된 한 '인민의 적'의 아들을 음악교육을 위해 은밀하게 돈을 지불했다. 여유가 되면 정부의 눈밖에 난 친구들에게 돈을 주었고, 대공포 시대에 감옥에 갇히거나 죽은 무고한 사람들의 누명을 벗기려고 최선을 다했다. 끔찍한 시대에 그가 가진 연민의 감정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고,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그 공포 속에서도 교향곡 7번을 작곡했다. 책을 덮고나서 생각해보니, 그런 그였기 때문에 교향곡 7번이 감동적으로 느껴졌지 않았나 싶다. 레닌그라드는 그의 고향이었다. 그의 고향이 수많은 문제에 휘말려 피냄새에 젖고 침묵에 가라앉을 때, 그는 예술로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을 위해 음표를 그렸다. 그 위대함은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뜨거운 감동으로 전해져내려온다. 어쩌면 이 책 자체가 한편의 장송교향곡이라는 책의 뒷면에 쓰인 것처럼, 책을 읽고나면 인간과 예술에 대한 가슴 뜨거운 감상이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왈츠로만 익숙한 작곡가 이름인 쇼스타코비치가 거대한 역사와 함께 다시 읽힐 기회다. 쇼스타코비치가 세상을 떠나기도 한 8월 9일, 레닌그라드에서는 전쟁의 포탄 속에서도 마음의 불을 일을켰다. 음악은 배를 채우지는 않았지만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정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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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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