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혐오스런 마츠코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영화]

글 입력 2018.05.25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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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는 제게 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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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 마츠코는 류에게 신이었다. 류는 마츠코의 인생에 존재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다. 둘의 첫 만남은 사제관계였다. 마츠코가 고등학교 교사였던 23세 때, 담임 반 학생이었던 류는 수학여행에서 매점 주인의 돈을 훔친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마츠코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돈을 훔쳤다 거짓말을 하게 되고, 교사직을 그만두면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마츠코는 '혐오스러워'지며 마츠코의 인생도 '혐오스러워'지는 것이다.(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중의적으로 읽힌다. 원제는 '미움받는 마츠코의 일생'으로 중의적 의미가 덜하다. 개인적으로 정확히 무엇이 혐오스러운 것인지 집어내지 않는 한국어판 제목을 좋아한다.) 평생 네 명의 남자를 거친 뒤 마츠코는 야쿠자 조직원으로 성장한 류와 재회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류는 곧 감옥에 가게 되고, 출소를 기다려준 마츠코로부터 도망간다. 줄곧 그것을 후회해왔던 류는 마츠코를 자신의 신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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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는 평생 무언가 결핍된 상태였다. 그녀가 가장 갈구한 것은 물론 사랑이었다. 병약한 동생에게만 마음을 쏟던 아버지 탓에 애정결핍에 시달리던 어린 마츠코는 삶의 시련을 겪을 때마다 새로운 남자를 찾아 기댄다. 그 남자들이 다시 한번 시련이 되고 상처받기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어디서부터 마츠코의 일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인생이 망가진 것이 마츠코의 우유부단함과 애정결핍, 부족한 판단력 때문이었던가. 아니면 마츠코가 만난 수많은 나쁜 남자들 때문이었던가.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지독히도 따라주지 않았던 운 때문이던가. 누구도 섣불리 판단하지 못하는 사이에 더럽고 뚱뚱하고 냄새나며 정신병을 앓게 되니 53세의 마츠코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마츠코의 첫 남자는 작가로, 자신을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고 믿었다. 마츠코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인간성을 짓밟았으며 끝내는 마츠코의 눈 앞에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두 번째 남자 역시 문학도였는데, 첫 남자의 친구로 그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가정이 있었고, 마츠코와의 불륜 사실이 들통나자 사실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게 아니라며 마츠코를 버린다. 세 번째 남자는 기둥서방으로 마츠코에게 성매매를 강요하며 마츠코가 번 돈 모두를 탕진하고 배신한다. 마츠코는 이 남자를 살해한다. 네 번째 남자는 아내와 사별한 이발사로 마츠코가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 달간 동거했다. 마츠코는 출소 후 그를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린 후였다. 이 모두를 거치고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류였다.

마츠코의 인생은 분명 신의 영역보다는 혐오스러운 진창에 가까워 보인다. 평생 버림받았고 비참했고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을 하며 살았고 몸을 팔았다. 절도와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죽음조차 혐오스러웠다. 더럽고 냄새나는 마츠코는 동네 어린애들이 휘두른 야구방망이에 맞아 죽는다. 마츠코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는 류 하나뿐이다. 그마저도 정상적이진 않다. 그런 마츠코는 어떻게 신이 되었는가.

*

마츠코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보기 전에, '신'이 된 다른 여자들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은 바리데기다. 바리데기는 비교적 잘 알려진 전통 설화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의 기본 줄거리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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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라에 딸만 여섯인 왕이 있었는데 왕비가 일곱 번째 딸을 낳자 대노한 왕은 아기를 바다로 띄워 보낸다. 석가세존에게 발견된 아이는 바리 공덕 할멈과 바리 공덕 할아범의 손에 맡겨져 자라게 된다. 세월이 흘러 바리데기의 친부모인 왕과 왕비는 죽을병에 걸리게 된다. 임금의 꿈속에 청의동자가 나타나 서역산에 있는 삼신산에서 약과 약수를 구해와 먹으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알린다. 그곳은 살아서는 갈 수 없으며 무장승이라는 괴한이 지키는 땅이었기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한다. 소식을 듣고 왕궁으로 온 바리데기는 약수를 구하러 길을 떠나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서역 땅에 도착해 무장승을 만난다. 무장승은 길을 열어주는 조건으로 나무 하기 삼 년, 불 때기 삼 년, 물 긷기 삼 년을 수행하고 자신과 결혼해 아들 세 명을 낳아줄 것을 요구한다.

바리데기는 이를 수락하고 9년 간의 시련 끝에 약과 약수를 구해 돌아온다. 이미 왕과 왕비는 오래전에 죽은 후였다. 바리데기가 통곡하며 서천 꽃밭에서 꺾어온 꽃들(각각 뼈살이꽃, 살살이꽃, 피살이꽃, 혼살이꽃)을 사용해 죽은 부모를 되살리고 아버지에게 인정받는다. 이후 바리데기는 죽은 영혼을 저승길로 인도하는 오구신이 되었고, 바리데기의 아들 삼 형제는 저승 시왕이 되어 저승을 다스렸다고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참 갑갑한 서사다.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바리데기는 부모를 위해 여섯 언니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한국 설화 속 대표적인 '효녀'로 거듭난다. 무장승이 바리데기에게 요구했던 역할도 '10년 가까이 내 집에서 아내로서 종노릇을 하며 아들 셋을 낳을 것'이었다. 묵묵히 시련을 견딘 바리데기는 부모에게 인정받고 마침내 신이 된다. 이제 또 다른 전통 설화의 주인공 당금애기를 보자. 당금애기는 땅의 어머니라는 의미의 '지모신' 설화로, 지모신은 출산을 담당하는 신이다. 즉 당금애기는 삼신할머니의 내력을 알려주는 설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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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곱기로 소문난 당금애기 집에 한 스님이 시주를 청하려 찾아갔다. 열두 담장 꽁꽁 닫힌 대문 안에 홀로 있던 당금애기가 문틈으로 살짝 내다보다가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당금애기가 지금은 집에 사람이 없고 곳간 문이 잠겼으니 시주를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스님이 지팡이로 하늘과 땅을 겨눈 뒤 경을 읊으니 문이 열렸다. 당금애기가 할 수 없이 쌀을 퍼주는데, 밑 빠진 바랑에 받아 쌀이 주르르 쏟아졌다. 놀란 당금애기가 빗자루로 쓸어 모으려 하자 스님은, 우리 부처님은 빗자루로 쓸고 체로 까부른 쌀은 받지 않는다며 뒷동산 개똥나무를 꺾어다가 젓가락을 만들어 그것으로 담아 달라고 하였다. 당금애기가 할 수 없이 개똥나무 젓가락으로 한 알씩 주워 담다 보니 해가 뉘엿 져버렸다. 스님은 하루 묵고 가게 해달라고 하였고, 당금애기는 부모님과 오라비가 외출하고 없으니 아무 방에서든 주무시라고 하였다. 스님은 부모님 방은 땀내 비린내가 나서 못 자겠고, 아홉 오라비 방은 땀내 누린내가 나서 못 자겠다며 당금애기 자는 별당 가운데 병풍을 치고 윗목에서 자겠다고 하였다.

당금애기가 할 수 없이 그렇게 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양쪽 어깨에 해와 달이 솟고 하늘에서 별 세 개가 떨어져 치마폭으로 들어오고 구슬 세 개가 내려와 입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당금애기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였고, 열 달 뒤 돌아온 부모님과 아홉 오라비는 당금애기가 큰 병에 걸린 줄 알고 하늘 무당 지하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니 모두 아기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화가 난 아홉 오라비가 당금애기 목을 치려 덤벼드니 어머니가 당금애기를 치마로 감쌌다. “이 아이는 하늘이 아는 자식이니 여기서 피를 내어 죽이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대신 돌함에 갇혀 산속에 버려진 당금애기는 아들 셋을 낳았다.

당금애기 아들 삼 형제는 재주가 남달랐지만 서당 아이들이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 놀려대니 매일이 눈물이었다. 참다못한 삼 형제는, 다른 아이들은 아버지가 있는데 왜 우리는 없느냐고 당금애기에게 따졌다. 아버지를 찾아가겠다는 삼 형제에게 당금애기는 그 옛날 스님을 만났던 일을 말해 주며 스님에게 받아 두었던 박씨를 주었다. 삼 형제가 박씨를 심었더니 이튿날 아침 박 줄기가 천 길 만 길로 뻗어 있었다. 삼 형제는 당금애기를 가마에 태워 모시고 박 줄기를 따라갔다. 박 줄기는 금강산 어느 절까지 뻗쳐 있었고, 거기엔 예전 그 스님이 있었다.

삼 형제가 스님에게 아버지 맞느냐고 하니 스님은 산 잉어를 회 쳐서 먹은 뒤 산 채로 토해내라고 하고, 강변에서 삼 년 묵은 소뼈를 모아다가 살아 있는 소로 만들어서 거꾸로 타고 들어와 보라고 하고, 문종이로 버선을 만들어서 물 위로 걸어 다니라고 하고, 짚으로 북과 닭을 만들어서 소리가 나게 하라고 하였다. 삼 형제가 모두 해내자, “은대야에 물을 떠놓고 손가락의 피를 흘려 한데 뭉쳐야 내 자식이다.” 하였다. 삼 형제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뒤 은대야 물에 흘리자 한 군데로 모아졌다. 이어서 스님이 피를 흘리자 삼 형제의 피와 구름같이 한데 어울렸다. 스님은 삼 형제에게 각각 태백산 문수보살, 사해용왕, 마을 서낭신이 되도록 하고 당금애기는 삼신할미로 들어앉아 자손을 점지하고 복과 명을 주어 긴 목숨 복되게 살도록 하였다.


신화적으로 잔뜩 포장되긴 했으나 당금애기는 사실상 강간당했다. 판본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스님과 당금애기가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낸 날, 당금애기는 차마 잠들 수가 없어 병풍을 치고 바느질을 하며 밤을 새우려 한다. 그러나 스님은 도술로 당금애기를 재워버린다. 그 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것이다. 강간당하고 임신하고 가족들에게 죽을 뻔한 뒤 버려져 산속에서 아이를 홀로 키운다.

바리데기와 당금애기는 모두 신이 된다. 두 서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둘 모두 본인의 잘못이 아닌 어떤 사건을 해결하거나 수습하기 위해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 했다는 점, 당대의 가치관에 따라 그 일의 결과를 평가받았다는 점, 그들의 실현한 가치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 이에 따라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점, 그래서 신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수행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바리데기는 '좋은 딸'이 되기 위한 덕목을 실천했다. 부모가 자신을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버렸든 버리지 않았든 그저 자식 된 도리로서 희생하고 감내하는 길을 택했다. 태어나서 몇 번 보지도 못했던 부모를 위해 저승길에 올라 십 년을 고생하니 말이다. 고생의 주 내용은 두 가지다. 고된 집안일과 아이 낳기. 당금애기의 경우도 기가 막힌다. 부모님이 안 계신 사이에 웬 스님이 찾아와(심지어 당금애기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남자다. 소름 끼친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동침하더니 그대로 임신시키고 사라졌다. 오빠들은 외간 남자의 애를 가졌단 이유로 당금애기를 죽이려 한다. 그 모든 시련을 다 견디고 아이를 낳아 잘 길러내고서야 당금애기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바리데기와 당금애기는 모두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했다. 바리데기조차도 좋은 딸이 되기 위해 어머니가 되지 않던가. 그 일은 필연적으로 고통과 희생을 수반한다. 여자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나서야 추앙의 대상이 된다.

두 이야기의 '어머니 됨'은 신이 됨과 같은 의미다. 전형적인 모성 신화다. 웃기게도 '어머니 됨' 좀 더 중심 이야기가 되는 당금애기 설화에서는 당금애기가 스님과 동침하지 않았음을 구태여 구구절절 설명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리데기의 어머니 됨은 궁극적으로 효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지만, 당금애기는 장차 삼신이 될 여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어머니이자 아이를 점지하는 성스러운 일을 하는 여성 신이다. 성스러운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 그래서 당금애기 스토리는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설정을 차용한다. '동정녀 당금애기'는 성녀다. 그러나 순결할 것은 성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다. 말도 안 되는 시련을 겪고도 어머니의 이름으로, 딸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다 해내야 한다. 여담이지만, 당금애기 줄거리를 설명하기 위해 네이버에 설화 내용을 검색하다 한 블로그를 방문하게 됐다. 그 블로그에서는 당금애기 설화를 소개하고 미혼모들의 책임 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역설하며 모성이란 '내 안의 힘'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고릿적 설화를 곧이곧대로 내재화하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아무튼 당금애기와 바리데기는 이 고난을 다 견뎠지만 그렇다고 영광의 직접적인 주체가 된 것도 아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들을 주인공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의 행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둘 모두 결국에는 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금애기가 존재를 인정받는 것은 후에 아들들이 자라서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임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세 아이가 스님이 친아들임이 입증되면서 당금애기는 말하자면 곁다리로 인정받은 것이다. 세 아들이 없었다면 당금애기는 온갖 고생을 다 하고도 끝내 잊혔을 것이다. 바리데기는 신이 되긴 되었는데, 그 와중에 세 아들은 저승 왕이 된다. 바리데기는 저승길을 안내해주는 신이 된다.


이들은 전형적인 성녀다. 성녀와 창녀 이분법은 흔하다. 그러나 마츠코는 둘 중 어느 하나에 정확히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름답고 젊고 조신한 '여교사' 마츠코는 결혼할 상대(생식용 여성)로 여겨지지만, 이내 성매매에 뛰어들면서 창녀(쾌락용 여성)가 된다. 그가 단순히 숭배의 대상에서 멸시의 대상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면, 사회는 그를 간편히 '창녀'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마츠코는 '창녀'로 일하면서도 남성을 사랑으로 감싸 안고, 심지어 남자를 보살피기 위해 다시금 '창녀'가 되는 일도 마다치 않는다.

-125p, 계간 영화잡지 프리즘오브 8호


마츠코는 바리데기, 당금애기와는 좀 다르다. 신은 신이되 혐오스러운 신이다. 혐오스러운 인생을 산 창녀다. 그러나 마츠코는 한없이 상처받으면서도 자신을 모두 내던지고 수렁에서 같이 뒹굴며 남성들에게 헌신한다. 그리고 그들 중 최소 한 명은 '구원'한다. 당금애기나 바리데기처럼 보편성을 획득하진 못했을지언정 류에게만은 '신'이 된다. 마츠코는 블랙 마리아로 거듭나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블랙 마리아'를 그린 영화 몇 편이 떠오른다. 처음 떠올린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이며 뒤이어 떠오른 것은 김기덕 감독의 몇몇 작품이다. 그중 '사마리아(2004)'의 줄거리 중 일부를 소개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유럽 여행을 갈 돈을 모으기 위해 채팅에서 만난 남자들과 원조교제를 하는 여고생 여진(곽지민 분)과 재영(한여름 분). 여진이 재영인 척 남자들과 채팅을 하고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으면, 재영이 모텔에서 남자들과 만나 원조교제를 한다. 여진은 재영이 남자들을 만나기 전 화장을 해주고, 그녀가 남자들을 만나고 있는 동안 밖에서 기다린다. 낯 모르는 남자들과 만나 섹스를 하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재영. 남자들과의 만남과 섹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재영을 여진은 이해할 수가 없다. 여진에게 어린 여고생들의 몸을 돈을 주고 사는 남자들은 모두 더럽고 불결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텔에서 남자와 만나던 재영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려 여진의 눈 앞에서 죽게 된다.

재영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여진은 재영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재영의 수첩에 적혀 있는 남자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재영 대신 남자들과 원조교제를 하는 여진. 원조 교제 후 재영이 전에 받았던 돈을 여진이 차례로 돌려주자 남자들은 오히려 평안을 얻게 된다. 남자들과의 잠자리 이후 남자들을 독실한 불교 신자로 이끌었던 인도의 바수밀다와 같이 여진 또한 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차례로 정화해 나간다.


재영은 몸을 파는 것이 더러운 일이 아니라며 심지어 자신을 '바수밀다'라고 칭한다. 바수밀다는 옛 인도 창녀의 이름이다. 그녀와 섹스한 남자들은 모두 불교 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재영은 섹스를 통해 남자들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일종의 변형된 성녀로 표현된다. 감독은 여성의 자아를 창녀와 성녀로 구분하며 창녀 됨을 통해 남성을 구원하는 블랙 마리아를 그려낸다. 김기덕 감독은 최근 추문에 휘말렸다. 여성을 철저히 객체로, 창녀와 성녀로, 구원자와 팜므파탈 혹은 그 모두인 매력적인 타자로 취급하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인지라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설화는 그럴 수 있다. 오래 전의 생활상과 가치관을 반영한 이야기고, 이야기의 외연만 가지고 작품을 비난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의미가 누적되어왔기 때문이다. 고전을 지금까지 이 글에서 논한 바와 같이 삐딱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읽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작품은 그래선 안 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블랙 마리아를 다루면서도, 마츠코 개인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불행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춘다. 그녀와 그녀의 삶을 너무나 혐오스럽게 그려냈기에 마지막 남자의 대사 한 줄에 언급되는 '신'따위가 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조소하게 된다. 성녀 되기도, 창녀 되기도 거부해야 한다. 지금의 이야기들에서 여성은 이제 인간으로 그려질 때다. 옛날 옛적 삼신할매, 바리데기 얘기는 그러려니 하겠다. 21세기의 김기덕 감독님께는 'x 까'라는 인사말을 전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이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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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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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은서람
    • 먼저 안도와 시원함의 한숨을 틔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체증이 좀 뚫려요. 전통설화와 다른 영화를 엮어 이때까지 사회가 여성에게 들이대 왔던 희생의 요구와 남자 없이는 구원도 없는 '여자가 신이 되는 과정', 논리있게 적어서 마지막 F*** YOU 한 방까지!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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