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트 시그널'과 포르노사회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5.17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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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그런 예능이 많다. 출연자가 특정 활동을 하거나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촬영하고, 스튜디오에 모인 패널들이 vcr영상을 보며 이러쿵저러쿵 얘기 나누는 모습을 방송에 내보내는 포맷. 요즘 핫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는 '전지적 참견 시점'(이하 전참시)이나 '나 혼자 산다' 정도가 있다. 훨씬 이전의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도 같은 포맷의 프로그램으로 묶일 수 있겠다. 우결은 가상 결혼 생활이라는 뚜렷한 콘셉트가 있으니 그렇다 치겠는데, 전참시나 나혼자산다 같은 경우에는 정말 그냥 다양한 출연진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그게 뭐 그리 특별한가 했는데, 화제성도 높고 실제로 꽤 재밌게 보게 된다.

뻔한 얘기지만 인간의 관음적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출연진의 일상을 스튜디오에서 패널들이 관음 하고(본인의 영상을 본인이 보기도 한다), 패널들이 영상과 관련해 수다를 떨고 반응을 보이는 모습을 안방에서 시청자가 관음 한다. 타인의 일상을 관음 하고자 하는데, 그 중간에 스튜디오 장면이 삽입되어 버리니 관음의 부담감이 희석된다. 내가 하고 싶은 관음을 패널들이 안전하고 떳떳하게 대신 수행해주니 시청자는 간접적 관음의 기쁨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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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핫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채널A에서 방영하는 <하트 시그널>이다. 8명의 일반인 남녀가 일정 기간 합숙하며 썸 타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도 역시 이중적 관음을 제공한다. 스튜디오의 패널들은 미리 편집된 시그널 하우스(이들이 합숙 기간 동안 머무르는 집을 시그널 하우스라고 부른다) 영상을 보며 출연자들의 심리를 추측하고 해석한다. 매 화마다 애정 전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것도 패널들의 역할이다. 이런 식의 '썸 타는 예능'은 하트 시그널이 그 시초도 아닐뿐더러 한국만의 문화도 아니다. 당장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일본의 <테라스 하우스: 도시남녀>가 있고, 그 외의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도 여기저기 비슷한 콘셉트의 예능이 많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본질부터가 카메라의 눈을 전지적 심급으로 두고 카메라의 시선에 보는 이의 시선을 일치시키는 것 아닌가. 그러니 일단은 하트 시그널을 일종의 관음 프로그램이라고 해두자.

보편적 욕망인 관음을 흔한 연애 예능 포맷으로 발현한 것을 넘어선 한국 예능의 더 큰 특징이 있다. 감정이 과잉되다 못해 흘러넘친다는 것, 과잉을 넘어서서 그 감정을 시청자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 페이지 '헬조선 늬우스'를 운영하시는 분의 글을 한 편 읽었다. 유료 구독자에게만 공개하는 글이기에 인용하기가 조심스럽지만, 과잉 감정을 떠먹여 주는 한국 예능의 특징을 너무 적절하게 짚어 읽는 내내 피식거렸다. 요지는 이렇다.

몇 년 전에 한창 인기를 끌었던 '나는 가수다'같은 프로그램을 보자. 가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부터 한 곡을 끝내는 3~4분 동안 거의 5초에 한 번씩 촌스러운 효과와 함께 자막이 등장한다. 노래 시작 전 가수가 감정을 잡고 있는 동안은 숨죽이며 그를 지켜보는 동료 가수나 관객의 긴장한 얼굴을 보여준다. 피아노 선율로 곡이 시작하면, 다시 동료 가수가 '어우~'하며 감탄하는 모습이 나온다. 무대를 비춰주고 '감미로운 선율' 따위의 자막이 추가된다.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환상의 고음' 같은 자막이 나온다. 가수가 고음부를 부르고, 자막이 나오고, 벅차서 눈물 흘리는 관객이 나온 뒤에는 심지어 해당 고음 파트를 다시 한번 들려주기도 한다. 노래가 끝난 여운으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고요한 상태에서는 다시 한번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관객을 비춰준 후 '정적', '말을 잇지 못하는..' 같은 자막이 효과와 함께 나타난다.

자막과 편집은 '시청자가 이렇게 봐주었으면' 하는 제작진의 의도를 내포한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는 기대감을 가졌으면 좋겠고, 고음이 터지면 감정도 같이 터졌으면 좋겠는 거다. 눈물 흘리는 청중을 보여주는 건 그게 이 노래에 대한 바람직한 반응 이어서다. 그래서 이들은 공백조차도 설명하려 한다. 사운드의 공백이 공백이 아닌 여운으로 읽혔으면 좋겠으니까. 임재범의 노래는 누가 들어도 감탄한다. 김범수나 이정현이 노래를 부르면 충분히 마음이 동하고 자연스레 눈물이 날 수도 있다. 문제는 제작진이 끊임없이 과장되고 과잉된 감정을 일방적으로 안방에 있는 나에게 강요하는 데 있다. 하트 시그널도 마찬가지다.


3.jpg▲ 인기 있는 남자 출연자의 등장과 여자 출연자들의 반응
 

한 남자 출연자의 첫 등장 때이다. 범상치 않은 남성이 현관문으로 들어서고, 뒤이어 여자들의 반응을 보여준다. 그냥 보여만 주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주목! 하라는 표시까지 친절히 해준다. 입술을 축이고 뒤에서 몸을 내밀어 내다보는 행위가 뭘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리라고 옆에 강렬한 하트 표시도 넣어준다.

정말 여성들은 김현우(남자 출연자)의 등장에 긴장했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두 여자 중 한 명은 실제로 며칠 뒤부터 김현우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지만, 한 여자는 다른 남자와 안정적으로 시그널을 주고받는다(패널들이 자꾸만 이 여자도 사실 김현우한테 약간의 호기심이랄까, 그런 감정이 남아있다는 식의 해석을 내놓긴 한다).

뒤의 서사를 알고 보면 첫 만남에서부터 임현주(뒤)가 김현우에게 끌림을 느꼈을 거란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 추측을 하는 건 2화, 3화를 이어 보고 난 시청자들의 몫이다. 제작진은 1화에서부터 '어때, 심상치 않은 남자가 등장했지? 그의 등장에 여자들은 설레고 남자들은 긴장하지?'라는 해석을 주입한다. 임현주(뒤)는 원래 잘 웃는다. 새로운 사람이 도착해 다들 나가 보는데, 앞사람 등 뒤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다. 누가 왔는지 궁금도 하다. 그래서 웃는 표정으로  빼꼼 내다봤을 수 있다. 김다은(앞)은, 글쎄, 그냥 입술이 말랐던 걸 수도 있고 긴장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애초에 시그널 하우스라는 게, 썸 타러 오는 곳 아니던가. 새로운 이성이 도착하면 당연히 약간의 기대감과 설렘을 가지고 그를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첫 만남의 긴장된(것 같아 보이는) 표정에 얼만큼의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이것 역시 시청자의 몫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일관된 해석을 강요한다.


1.jpg▲ 김현우가 운영하는 식당에 방문한 여자 출연자들
 

이들이 '몰랐던 현우의 다정함'을 이 순간 느끼고 있었을 거란 사실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을까. 혹시 그냥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오픈 키친에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김현우)의 모습이 신기했던 건 아닐까.


2.jpg▲ 김현우와 대화하는 오영주를 쳐다보는 임현주
 

오영주가 김현우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맞다. 임현주는 이미 공공연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뒤였던 것도 맞다. 그러니 오영주가 김현우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위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을 거라는 건 억지스럽지 않은 추측이다. 하지만 굳이 '빤히'라는 자막을 끼워 넣은 것은 삼각관계를 극적으로 연출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가는 한 커플이 있고 그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영악하게 행동하는(소위 여우짓을 하는) 다른 여자의 관계는 진부하지만 잘 먹히는 구도다.

관음적인 것은 해석의 여지를 수반한다. 관음 한다는 것은 열쇠 구멍으로 엿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엿보이는 방안의 모습은 열쇠 구멍 모양의 테두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구멍으로 보이는 존재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열쇠 구멍 밖의 사각지대를 채우는 것은 바라보는 주체의 상상력이다. 관음 하는 자는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대상을 지켜보며 화면의 빈 공간에 해석을 채우는 것이다. 이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비슷한 일본 프로그램 <테라스 하우스: 도시 남녀> 다. 하트 시그널과 비슷한 포맷이지만 이 프로그램은 자막의 사용을 자제하고, 일어난 일을 시간 순서대로 최대한 개입 없이 보여주려 한다. 프로그램은 누구도 화면을, 화면 속의 인물들을 지켜보지 않는다는 듯이 시청자의 존재를 배제한다. 그래서 <테라스 하우스>의 시청자는 관음 하는 자다.

반면 하트 시그널은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한다. 대중이 프로그램을 지켜보고 출연자의 행동 하나, 표정 하나에 의미를 부여해가며 관람을 즐긴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봐 달라며 포즈를 취한다.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현대 사회를 이렇게 진단한다.


이미지는 모든 연출과 안무, 미장센이 제거될 때, 모든 해석학의 깊이가, 즉 의미가 사라질 때 포르노가 된다. 포르노는 이미지와 눈의 직접적인 접촉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과도한 가시성의 장에 던져넣음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를 촉진한다.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전시가치의 극대화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 따르면, 하트 시그널의 연출법은 포르노적인 것이다. 눈과 화면 속 상황 사이에는 거리가 사라지고 이미 만들어진 의미가 즉각적으로 와 닿는다. 거리의 부재로 인해 지각은 촉각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때 촉각성이란 극도로 근접한 "눈과 이미지의 마주침(장 보드리야르)"을 의미한다.

하트 시그널은 화려한 외모와 스펙의 남녀를, 그들의 호화로운 일상을, 연애를 전시한다. 이런 프로그램에 으레 따라오는 '대본 논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출연자들이 얼마만큼 진심이었고 그들의 관계가 얼마만큼 연출된 것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프로그램의 문법은 필연적으로 해석하는 자를 전제하고 내용을 전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 해석하는 자는 아무것도 해석하지 못한다. 프로그램이 포르노화 되는 순간 시청자는 직접적인 접촉을 경험하며 거리가 사라짐에 따라 어떤 심미적 관찰도, 머무름도 불가능해진다. 한병철은 촉각적 지각은 심미적 거리를 둔 시선의 종언, 더 나아가 시선 자체의 종언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토록 투명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너무 즉각적으로 의미를 쏟아낸 나머지 오히려 의미를 상실한다. 은밀함과 비밀의 소산인 에로틱함과 달리 포르노적인 것은 매력적이지도 않고 암시적이지도 않다. 포르노적인 것은 자극할 뿐이다.

문제는 '관음 당하는'듯 하지만 사실은 '관음을 허용하고 심지어 기꺼이 자신을 내보이고'있는 존재는 시선의 주체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의도되고 연출되어 직접적으로 눈과 뇌에 꽂히는 해석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게 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이고, 저들은 본인의 욕망에 따라 순수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걸 관음 하는 전지적인 나는 저들의 행동을 해석하고 심리를 추측하는 중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


패널.jpg▲ 출연자의 행동을 해석하고 감상을 전하는 패널들
 

패널의 존재는 이 허상을 강화한다. 패널은 시청자와 같은 입장에서 출연자를 지켜보는 듯하다. 안방에 있는 나와 스튜디오에 있는 패널은 동등한 관계이며, 마치 친구와 같이 티브이를 보며 "야 쟤가 쟤 좋아하는 거네~"따위의 해석을 나누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패널은 상당히 날카로운 분석을 해내는 것 같고, 어떤 패널은 영 감을 못 잡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도 결국 미리 촬영되고 편집되어 적절히 자막 효과와 버무려진 일방적 해석이다. 출연자  vcr인 1차 현실과 스튜디오 화면인 2차 현실을 거쳐 시청자는 해석을 '해낸다'. "아~ 김현우 심리는 이거네! 처음에는 얘한테 관심이 있었는데, 쟤가 건드리니까 호기심이 생겼던 거네!".

프로그램은 작년(2017년) 말에 이미 촬영을 시작했고, 1화가 시작되기도 전인 1월에 이미 모든 촬영이 끝났다. 출연자가 최종적으로 누구를 선택했는지는 다 나왔다. 출연자들 간의 서사를 다 아는 제작진은 오랫동안 회의를 했을 것이다.

'얘랑 얘랑 삼각관계는 이런 순서, 이런 프레임으로 부각하자. 서로 좋아하는 두 남녀가 있고 남자를 좋아하는 또 다른 여자가 있네, 얘를 가련한 일편단심으로 만들까, 아님 영악한 여우로 만들까?' 방향성이 정해지면 편집과 자막을 통해 은근한 암시를 전할 수 있다. 여우 같은 출연자를 만들고 싶다? '찌릿', '빤히' 이런 자막을 넣으면 된다. 참 쉽죠?

*

물론 요즘 시청자들은 이런 한국식 예능 문법에 너무 익숙하다. 이런 제작진의 의도를 간파해 거의 논문에 가까운 분석글을 쓰기도 한다. '매의 눈으로 여러 번 돌려 본 결과, 이 장면과 이 장면은 편집 순서가 바뀌었고 이 장면과 이 장면 사이에는 생략된 장면이 있다. 따라서 실제 상황은 이러이러했을 것'이라는 식으로.

나가수식의 과잉 감정 프로그램은 이제 한물갔다. 많은 사람들이 분석하였다시피 시청자가 피로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프로그램이 쏟아냈던 감정을 생각하면 그게 몇 년이나 간 것도 신기할 지경이다. 이제 예능은 과잉 감정과 의도된 해석을 리얼리티라는 포맷 속에 살짝 숨겨, 스튜디오라는 중간지대를 거쳐 은근슬쩍 부담 없이 시청자에게 던진다. 그들의 방식에 적응한 시청자들도 점점 발전해 편집으로 조각난 진짜 상황을 모아 짜 맞춘다. 이 과정이 또 하나의 유희가 되기도 한다. 이 줄다리기의 결과 한국 예능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가 흥미롭다.


[이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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