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험을 겪은 모든 이에게 [기타]

8은 ∞가 되었다
글 입력 2018.04.23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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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글쓰기 시간을 이번 주는 놓쳤다. 사라진 건 글과 글을 쓰는 시간이 아니었다. 토요일이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다.’라는 사실마저도 놓친 채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다. 토요일을 빼앗는 대신 가득 메운 것은 평가와 잣대, 기준에 놓일 나를 위한 준비였다. 사실, 누구를 위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해나가는 준비였다.

한 번 세어보자. 22살의 나는 중간, 혹은 기말이라는 이름이 붙는 시험대에 총 32번 올랐으며 48시간 내에 33이라는 수를 마주한다. 흐릿한 기억 속 어린 나는 의사와는 상관없이 매 주 받아쓰기를 해야 했으며 성취도를 평가한다는 시험, 단원을 평가한다는 시험, 쪽지 모양은 없는 쪽지 시험, 반 배치에 참고한다는 목적의 시험, 심지어 나의 체력을 평가하겠다는 시험까지 견뎌야 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학생에서 갓 벗어나 어엿한 고등학생이 된 후에는 수능이라는 이름의 시험을 총 두 번 보았으며, 그 사이에 모의고사라는 놈은 친구 얼굴보다도 많이 만났다.

그리고 스물 둘의 나에게는 8번의 시험이 남아있다. 드디어, 한 자리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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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2/3 따위를 답으로 적어야 했던 단원평가, 고등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와 모의고사, 고등학교 3학년 9월 모의고사 수학영역, 그리고 수능. 나는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평가라는 실체 없는 형체는 감히 나의 어떤 모습을 평가하며 나의 어떤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인가? 아니, 이는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기계에 불과했다. 어느새 수와 반비례하게 흘리는 눈물과, 고통 받는 내 모습을 확인할 뿐이었다. 시험을 만나는 우리는 오를 곳이 너무나도 많았다. 0도, 50도, 90도 부족했다. 100을 향해 달렸다. 누가 정한 기준인지, 누가 정한 한계인지, 누구를 ‘백’이라 부르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달렸다.

그리고 정상에 올랐으니 숨을 쉬어보자며 눈을 떴을 때, 이 세계는 upside down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100은 0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이에게 주어지는 허망함. 그리고 평지와 내리막길만 가득한 곳에서 집착적으로 붙잡아야 하는 난간. 가장 숨 쉴 수 없는 곳은 바닥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괜찮다. 나는 시험 8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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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의 고행이 끝나면 무엇이 남을까. 누가 나에게 위로를 건넬까. 혹은 안쓰러웠다며 울어주기라도 할까? 울어주는 그 사람조차 이 과정을 거쳤을 테다. 그렇다면 그 눈물의 의미는 무얼까. 8이 비로소 0이 된다면 이 사회에 화를 낼 자격이 생기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라는 사람을 남이 규정하는 이 세상에서 소멸할 권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알지만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우리는 안다. 사실 8은 진즉에 쓰러져, ∞가 되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태어나 부모에게 안기며, 의사가 내뱉는 “공주님입니다.”를 들었을 그 순간부터 이미 남이 정하는 나의 생이 시작된 것이다. 매 순간이 시험이다. 진정 무서운 시험은 ‘시험’이라 쓰여 있지 않은 시험일 것이다. 지식도 의견도 아닌 내 인생이 평가받는 기분. 아직 어린 나는 당장 내일의 시험부터, 평생 남은 시험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두렵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나면 어제보다는 적은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험을 겪은, 시험이 남은 모든 이는 위대하다.

내가 더 나은 결과에 속하기를 기대하는 일을 버리기를 기대하는, ‘내 기준의 나’로 자랄 것이다. 나만은 나에게 시험을 쥐어주지 않으면서, 그렇게, 어른이 될 게다.


[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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