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시 읽는 수능 지문 치숙_채만식 [문학]

어리석은 '나', 그리고 아저씨
글 입력 2018.04.22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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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숙>_채만식
어리석은 '나', 그리고 아저씨


‘치숙’은 어리석은 아저씨라는 뜻이다. 이는 소설 속 ‘나’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한 숙부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곤 한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며 무의식적으로 그 인물을 응원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르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나’의 서술에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게 된다.
 

내 이상과 계획은 이렇거든요. 우리 집 다이쇼가 나를 자별히 귀여워하고 신용을 하니깐 인제 한 십 년만 더 있으면 한밑천 들여서 따루 장사를 시켜 줄 눈치거든요. ···(중략) 그리고 우리 다이쇼도 한 말이 있고 하니까 나는 내지인 규수한테로 장가를 들래요. ···(중략) 그리고 내지 여자한테 장가만 드는 게 아니라 성명도 내지인 성명으로 갈고, 집도 내지인 집에서 살고, 옷도 내지 옷을 입고 밥도 내지 식으로 먹고, 아이들도 내지인 이름을 지어서 내지인 학교에 보내고……


‘나’는 일본인들의 사상에 동화된 인물이다. 일본인의 가게에서 일을 하며 일본어를 쓰고, 일본 잡지를 보고, 일본 여자에게 장가를 가고 싶어 한다. 식민지 사회에서 이것이 성공하는 길이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관점에서는 사회주의인지 막걸린지를 하느라 인생을 망친 아저씨가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 주인과 일본식 교육에 길들여진 인물이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나'와 아저씨가 나누는 대화를 살펴보면 '나'의 무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숙에서 1차적으로 풍자를 하고 있는 대상은 소설의 서술자가 된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나’의 어리석음만이 아닌 듯하다.


"고생을 낙으로, 그 쓰라린 맛을 씹고 씹고 하면서 그것에서 단맛을 알아내는 사람도 있느니라.···(중략) 너희 아주머니만 두고보더라도 고생이 고생이면서도 고생이 아니고 고생하는 게 낙이란다."
"그렇다고 아저씨는 그걸 다행히만 여기시우?"
"아―니."
"그렇거들랑 아저씨두 아주머니한테 그 은공을 더러는 갚아야 옳을 게 아니요?"
"글쎄, 은공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인제 병이나 확실히 다아 나신 뒤엘라컨……"
"바빠서 원……"


소설이 2차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인물은 아저씨이다. 독자는 작품을 한번 읽으면 ‘나’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고, 두 번 읽으면 작가가 아저씨마저 풍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와의 대화를 보면 아저씨는 사회주의 및 경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유학까지 다녀올 정도의 학문을 한 지식인이다. 그러나 아저씨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살펴보았을 때 2차적인 풍자가 드러난다. 아저씨는 신지식과 사상을 받아들일 줄 아는 인물인 것처럼 말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와의 대화에서 아저씨는 현 시대에서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제시된 위의 대화를 보면, 사실 아저씨가 그 사상들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내의 일방적인 부양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옥살이를 끝낸 후에 20년 동안 소박을 맞혔던 아내에게 도움을 받지만 그 은공에 대해서는 갚을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

아저씨는 아내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며, 그것을 아내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이는 아저씨의 가부장적 면모를 드러내며 구시대적 사상을 가진 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나’가 아저씨에 대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줄 아는 무능력한 이라고 바라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채만식은 어리석은 ‘나’로 치환되는 길들여진 민중을 비판한다. 또한 새로운 사상을 실행할 지식인이 실제로는 행동하지 않고, 무능력한 이라는 것에도 비판한다. 이것이 채만식의 풍자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단순히 한쪽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점을 취하고 효과적인 풍자를 해낸다. 이제 한 쪽은 부정적인 인물, 한 쪽은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보자. 단순히 좋은 것, 나쁜 것을 가르는 것이 소설의 목적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렇게 여러 번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것이 소설을 더 의미 있게 읽는 법이 아닐까.


[김새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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