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장의 CEO, 앤디 워홀

글 입력 2014.02.04 16:3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 프로그램을 접하기 전 나는 ‘앤디 워홀’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생소해서 내용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지만 ‘앤디 워홀’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잠깐, 워홀의 재치와 사업성에 대한 얘기해볼까? 그는 의뢰인의 초상화를 항상 네 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예의 돈 많은 그의 의뢰인을 스튜디오로 오게 했고 의뢰인은 네 장 전부 맘에 들어 쉽게 결정짓지 못하는데... 그때 워홀은 한 장엔 2만 5000달러, 네 장을 전부 구입하면 4만 달러에 주겠다고 은근슬쩍 흥정을 한다. 의뢰인들은 보통 네 장 전부를 구입했다고 한다. 초상화 실크스크린 작업만으로도 1년에 200만 달러를 벌었던 ‘앤디 워홀’이다.







이 작품에는 음악이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 유행했던 팝송을 선곡하여 곳곳에 대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고 팝아트의 작품에는 고혹적이고 마법에 걸린 듯한 사운드를 위해 ‘이니그마’와 ‘Era’ ‘핑크 플로이드’ 의 음악, 또는 박자가 안 맞는 듯한 전위적인 음악과 어딘지 잘 못 만들어진 것 같은 음악, 그러나 편안한(?) 음악을 선곡했다. ‘앤디 워홀’의 느낌이 그랬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예술가 ‘앤디 워홀’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기억해본다.




프롤로그


20세기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꼽히는 체 게바라 사진이 유명해진 것은 앤디 워홀의 작품으로 알려진 포스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워홀의 조수가 몰래 팔려고 제작한 위작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워홀은 조수를 고소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는 고액의 작품 값을 챙겼고 조수는 사기죄를 면할 수 있었다. 돈 버는 것도 예술이라고 말한 앤디 워홀. 그에게 있어 예술은 혼자서 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듯 직원을 채용해 미술작품을 찍어냈다. 그는 예술의 고정관념을 깬 미술공장의 CEO였다.




상업과 패션 그리고 예술의 도시, 뉴욕

세계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뉴욕. 뉴욕의 맨해튼 록펠러센터에 자리 잡은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2006년 11월, 현대미술 작품에 대한 경매가 열렸다. 이날 경매에서 앤디 워홀의 ‘오렌지 마릴린’이 145억원에 낙찰되었다. 많은 컬렉터들이 워홀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왜 값비싼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할까? 그림은 재테크도 되고 벽에 걸어놓고 자랑도 할 수 있는 부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젊은 펀드매니저나 자산 관리사들은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되면 대부분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보여줄 수 있는 현대 미술품 투자에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 또 사회적 특권이나 신분 상승, 상류층과 어울리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미술에 투자를 한다.  

피츠버그 출신인 앤디 워홀이 대학 졸업 후 처음 맡게 된 일은 한 잡지 기사의 삽화였다. 사다리 맨 꼭대기 위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는 여자가 그려진 이 기사의 제목은 ‘뉴욕에서는 성공이 직업이다’였다. 그는 번지는 듯한 느낌의 블로팅 기법으로 삽화를 그렸는데 이 기법이 매력적이었는지 그를 선호하는 광고주들이 점점 늘어 1950년 26세에 상업 미술계에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현대미술을 주도하기 시작한 뉴욕. 세계적인 컬렉션 규모를 갖추게 된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에 정작 미국 작가의 작품은 없었다. 모마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미국 작가의 작품이 필요했다. 잭슨 폴락. 마치 서부 개척자들처럼 광활한 자연을 누비며 펼쳐지는 것 같은 폴락의 액션 페인팅은 미국 미술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정부의 후원으로 유럽 순회전시회를 몇 차례나 가질 수 있었던 폴락은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고 그의 활동 무대였던 뉴욕은 세계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업미술가였던 앤디 워홀은 폴락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하고 집집마다 TV를 갖게 되면서 대중스타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경제적 독립이 가능해진 젊은이들은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고 대량소비문화를 환호했다. 이것이 팝아트의 시작이었다. 팝아트는 TV, 잡지, 광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 소재가 되었는데 소재가 세속적일수록 더 인기 있었다. 앤디 워홀은 너무나도 평범한 캠벨 수프 시리즈로 순수미술계에 입성했다.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하여 제작했고 무늬별로 나눠뜬 판형에 정해진 물감을 부어 완성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엔 색깔만 다른 시리즈가 많다. 이미지를 반복 나열한 이유는 냉정하고 무감각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워홀. 그가 대량생산을 위해 공장에서 사용하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신성한 예술 창작에 사용했다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라고 부르며 작품을 대량생산했고 이를 위해 직원도 고용했다. 그는 숱하게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언론에 대서특필 될 때마다 언론을 자신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했다. 워홀의 이름이 오르내릴수록 그의 팩토리를 찾는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팩토리는 영화제작자, 화가, 시인 등 전위 예술가의 집합소가 되었다.

워홀은 대중 스타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했는데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1968년 솔라나스라는 여성에게 저격당해 대수술을 받게 된 워홀, 그는 이 사건 이후 초상화작업에 더욱 몰두했다. 폴라로이드 사진에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쉽게 작업을 하여 거액을 받는다고 빈축을 샀지만 그럴수록 워홀은 더욱더 돈을 쫒았다.

1969년 그는 유명인사와의 대담을 실은 ‘인터뷰’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스타와의 인터뷰를 편집 없이 게제 하는 게 특징인 ‘인터뷰’. 그는 잡지를 길거리에서 무료로 나눠주면서 새로운 광고주를 만들어갔고 표지모델을 했던 유명 인사들은 자연스럽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리하여 ‘사교계 초상화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스타와 돈, 둘 다 거머쥔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업을 잘하는 것이 가장 환상적인 예술’이라던 그는 최고의 예술가였다. 돈 그리는 것이 제일 좋다고 했던 워홀은 80년대 들어서 작품의 소재를 아예 돈으로 했다. 미디어 시대에 스타의 상품성을 꿰뚫고 있던 워홀은 직접 TV쇼 진행도하고 광고에도 출연했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자화상. 그는 스스로 스타가 되었다.




워홀은 1987년 2월 담낭 결석 수술 후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59세. 그의 사망 당시 팩토리에는 엄청난 유작이 남아있었는데 이 작품들은 워홀의 인기에 힘입어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 그 결과 미술시장은 성장한 반면 상업성이 더 짙어졌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갤러리들은 워홀에 버금가는 스타작가를 찾으려고 한다. 현재 워홀을 잇는 스타작가는 제프 쿤스. 그는 스스로 워홀의 작품을 차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대표적인 키치작가, 제프 쿤스의 작품 값은 대부분 100억 이상이다. 스타작가는 본인뿐만 아니라 전속 갤러리에도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갤러리들은 스타작가를 필요로 한다. 스타작가 한명이 갤러리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이 더해지면서 갤러리들은 어린 학생을 전속시켜 스타로 키우고 있다. 대중 연예계의 스타시스템이 미술계에도 자리 잡아가고 있다.




에필로그


이제는 대중스타 대열에 선 앤디 워홀. 그는 ‘왜 사람들은 예술가들을 특별하게 생각할까? 단지 또 다른 직업일 뿐이다.’라고 했다.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으면 예술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상업과 순수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앤디 워홀. 덕분에 예술은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광고가 예술작품이 되고 예술작품이 광고로 변신하고 있는 이 시대. 시장의 논리는 여전히 예술의 가치를 지배하고 있다.

넘치는 에너지와 함께 대단한 열정으로 아이디어를 분출해냈던 앤디 워홀.
그는 하늘나라에서도 초상화를 그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곳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없으니까... 앤디 워홀, 천사들의 초상화는 얼마인가요? 글 · 한문휘








출처 - 음악저널




[최서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