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1세기에게 20세기가 던지는 이야기 -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 2016) [영화]

서툰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를 위해
글 입력 2018.04.2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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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볼 땐 항상 스쳐가는 많은 것들이 있다. 하나하나 뱉는 대사들은 강력한 여운에 묻히기도 하고, 장면을 극대화해주는 배경음악은 장면전환에 묻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대사들이 그렇게 묻힌다면 정말이지 너무나 아쉬울 것 같다. 나는 20세기 말에 태어났지만 이 영화는 당시 20세기에 어른이었던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여자들의 이야기라, 궁금했다. 도로시아의 포드차에 불이 붙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남편 없이 아들인 제이미와 함께 살아가는 50대의 여자와 그녀 집에 세 들어 사는 에비, 윌리엄, 줄리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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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의 시대는
좋은 차 좋은집 따분함으로 가득하다.
갈수록 그 아이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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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다양한 관점으로 풀어내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루하지 않을 뿐 더러 여러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엄마 도로시아와 아들 제이미의 관계이다. 도로시아는 아빠가 없이 자란 제이미가 걱정되었고 유일한 어른 남자였던 윌리엄에게 그를 부탁한다. 하지만 둘 사이는 영 가까워지지 못했고, 모자관계는 역시 점차 멀어져만 간다. 제이미는 여느 사춘기 남학생과 다름이 없다. 그의 친구 줄리에게 성적 호기심을 느끼고 엄마 도로시아에겐 반항심을 느끼는. 도로시아 역시 그녀가 맞은 여자로서의 50대에 대한 생각,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방황하고 있었던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들의 관계는 가까워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거야 라고 소리치는 제이미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도로시아. 시끄러운 락 음악 왜 듣는지 이해를 못하는  엄마와 그 노래에 몸을 맡기는 제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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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도로시아는 그를 꾸짖는 대신 그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봐 준다. 친구들이랑 LA를 가서 일탈을 하든, 애비와 함께 클럽을 가든. 그래도 언제 들어오나 잠 못이루다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아무 말 하지 않고 잠에 드는 그녀의 모습은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도로시아는 결국 아들이 하는 것들을 따라 해본다. 아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보고, 아들이 가는 클럽을 가보고,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이해가 아닌 인정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조금은 느리게 성장하고 있었다. 모자간의 관계, 조금 서툴어도 괜찮아.


"지금이야 정말로 힘들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금방 괜찮아져,
그래봐야 또 힘들어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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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애비가 나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20대의 여자,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산타바바라로 왔다. 사진을 전공한 그녀는 자신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물건들의 사진을 찍는다. 이런 사진들이 결국 자신이 아니냐는 얘기를 한다. 구두, 엄마 사진, 지갑. 그녀의 첫 등장은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자궁경부암이었고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도로시아는 그녀를 위로해준다. 빨간 머리를 하고, 특이한 옷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은 뉴욕에서 산타바바라로 들어온 그녀는, 제이미에게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한다. 너 여기 있으면 기껏해야 안경점에서 일할 거라고. 제이미에게 공간적인 한계를 두고 싶게 하지 않았던 그녀는 제이미를 클럽에 데려다주고, 여자를 꼬시는 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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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이미에게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으라 권한다. 제이미는 애비 덕분에 어리지만 여자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꽤나 주체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도로시아가 여러 사람들을 초대해서 저녁을 먹는 장면이다. 생리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1920년대에 태어난 도로시아는 남자들 앞에서 무슨 이야기냐고 이야기를 멈추라 한다. 하지만, 애비는 생리라는 단어를 뱉는 게 뭐가 잘못된 거냐며 제이미에게 생리라는 단어를 크게 얘기해보라고 요구한다. 생각해보니 남자가 그 단어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내뱉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여자의 자연적인 현상이고 삶의 일부이니까. 그 뒤로 줄리는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첫 성경험을 이야기한다. 결국 도로시아의 분노로 대화는 종료되었지만, 이 식탁에서의 대화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21세기인 지금도 조금은 늦게 인정이 시작됐다. 페미니즘이든, 성과 관련된 이야기이든. 그런데 20세기의 작은 탁자 위에서 그런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 이야기는 애비라는 '여성'을 통해서였다.


"행복한지 따져보는건
우울해지는 지름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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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공간은 20세기이지만 결국 21세기 사람들이나 그때 사람들이나 느끼는 것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의 부제가 서툰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공간은 앤티크하고 색채감이 덜하고 정적이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는 상당히 동적이다. 제이미는 엄마의 젊은 시절을 알지 못한다. 항상 담배를 피고 고민이 많아 보이는 엄마는 굉장히 외로워 보인다. 엄마가 정말 행복한지 물어보는 제이미의 말에, 도로시아는 행복해지려고 집착하는 건 불행해지는 지름길이야라고 대답한다. 사실 나는 일상생활에서 행복한지 아닌지 크게 따져보진 않는다. 나 정말 행복해? 이런 물음이 아닌, 행복하다. 이렇게 마침표로 끝낸다. 끊임없이 질문하다 나의 결함들에 좌절하게 되고 결국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많이 공감이 됐던 대사이다.


"1999년 3월에 난
피로와 정신 혼미를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병원에 가게 되면
의사가 폐암이 이미 가슴과 뇌로
전이됐다고 말할 것이다"

: 50대의 한 여자를 비추다.


1924년대에 태어난 도로시아가 1999년까지 산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1920년대의 사람들은 돈도 음식도 없었고 전쟁이 일상이었다. 도로시아는 당시 파일럿이 꿈이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제도실에 입사하게 된다. 20세기의 마지막인 1999년, 도로시아는 21세기를 맞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파일럿을 타고 행복한 웃음을 짓고 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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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한 글귀가 나온다. 페미니즘 서적을 읽은 제이미가 도로시아에게 읽어주는 구절이다.

"난 성적, 사회적으로 쓸모 없어졌고 그 사람은  아니다. 이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20대엔 아니다. 오르가즘도 자주 느끼고 만족시키는 법도 알지만 남자에게 호감을 표시할 수 없다. 그랬다간 모욕으로 받아들일 테니, 난 내 작은 기능을 수행하고 사라져야 한다."

나는 그런 책 안 읽어도 날 잘 알아라고 대답하지만 도로시아의 표정은 어딘가 씁쓸하다. 늙어가는 여성과 그에 따른 외로움, 쓸모 없어져 가버린다는 두려움. 한 아이의 엄마이기 전에 그녀는 여자이다.





사실 21세기의 우리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았을 때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을 것이다. 흔히 쓰는 핸드폰이나 TV도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환경적 요소들이 주인공들을 지배하진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방황하는 것, 담배를 물어보는 것, 삶에 대해 답을 찾아보는 것에 집중한다. 시대가 구식이라고 생각까지 구식은 아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우리는 더 나아지지 않는다.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적절한 나레이션과 인물 간의 적절한 갈등으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살아보지 못한 세기의 이야기지만, 지금의 2018년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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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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