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에 뮤직홀리시티, 현실이 된 한국음악의 꿈’ 꿈의 완성자, 바이올리니스트 동형춘

글 입력 2014.02.0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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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동안 재능 나눠온 캠프, 지금은 아시아음악의 꿈이 되다



1월 초 바이올리니스트 동형춘은 겨울캠프를 열었다. 캠프에 참가해 공부한 학생만 250명이다. 지도교수가 40명, 돌아간 학생이 참가한 학생보다 많았단다. ‘상록뮤직캠프’라는 이름인데, 1975년에 시골 벽지학생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시작한 캠프로 현악기 전공자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상한가다. 10만원 내외의 저렴한 참가비, 알 때까지 레슨 받는 유명교수들과의 3박 4일 끝장실기교육은 마약처럼 이 캠프의 특성으로 얘기된다.

“그동안 캠프해서 돈 좀 벌었냐고요? 돈을 벌기보다 캠프 하려면 상록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돈을 조금씩 모아서 1년에 두 번 있는 캠프 때 보태야 캠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지도교수들에게 겨우 차비 주는 캠프구요”

그럼 지도교수가 별로냐고?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최고의 교수진이다. 양해엽, 강동석, 이경선, 지진경, 임재홍, 양성식, 양성원, 김남준 등이 책임교수고, 한참 유명세를 얻는 젊은 연주자들이 담임교수들이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학창시절에 상록캠프를 알았고, 그 인연으로 성공한 연주자가 된 후에 캠프에 재능기부를 하고 가르치는 지도자로 참가한다. 이 때문에 작은 참가비로 배웠던 은혜가 오늘날 사례비 생각 않고 지도교수로 서고 있는 것이다. 40년째 세상에 베푼 사랑의 결과들은 최저 참가비로 최고의 캠프를 만드는 비결로 나타났고, 이 캠프가 이렇게 가능한 이유이다. 

이 뮤직캠프는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동남아, 태국, 중국에서 이 캠프는 벤치마킹해야 할 최고의 한국음악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이 캠프를 말한다. 중국과 태국은 매년 단골로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고, 태국은 이 캠프의 지도교수와 오케스트라를 초청하여 여름행사를 자국에서 유치하면서 한국음악 따라 배우기의 모델로 삼고 있다. 동형춘 교수가 이끌고 있는 이 캠프는 이름이 ‘상록국제음악캠프’이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한 캠프



한 40년쯤의 역사를 가진 이 캠프의 처음 시작은 참 소박하다. 1975년 음악을 잘 하는 초등학교 교사들과 바이올리니스트 동형춘 교수가 시골 벽지 어린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눠 음악을 가르쳐주자는 생각을 갖고, 여름·겨울방학 때 비영리 뮤직캠프를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동형춘 교수는 그 교사들의 리더였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하자, “교육은 사람을 바꾸고 사람을 살린다는 생각이 있어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 높은 음악적 능력을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벽지어린이들에게 음악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캠프였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배우고 싶어 하는 음악도 한사람을 찾아 시골벽지까지 버스를 보내 오지학생 한 사람까지 데려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시켜보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동형춘 선생은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교회 장로이고 세상일을 신앙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이라 했다. 그래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사명감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특별한 진리지만 믿음으로 시작하는 일은 모든 게 씨앗이이서 시작은 미약하고 결과는 창대한 하나의 법칙을 가진다. 음악캠프의 발전도 그랬다. 시작 후 이 캠프는 세상을 가득 채울 듯 유명한 캠프로 발전했다. 그만, 그만 손사래를 칠 때까지 캠프는 확대됐다. 2000년도 경주뮤직캠프 때는 그 규모가 절정에 달했다. 밀레니엄기념으로 경주 체육관을 빌려 열었는데 2,000명의 국내 현악기 주자들과 태국 육군교향악단이 내한하여 함께 캠프를 했다.

상록뮤직캠프는 규모만으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저렴한 참가비용인데, 지도교수가 최고라는 것 때문에 주목을 받는다. 교수진은 양해엽 선생을 비롯, 강동석, 양성식 이경선, 임재홍, 최승용, 양성원, 지진경, 이승진 등 국내 유명 교수와 외국에서 디디에 포스캥, 탐젤 등 미국과 유럽 교수 등 유명한 음악인들로 짜여 진다. 어떻게 유명 지도교수 유치가 가능할까, 기적 같아서 묻자 동형춘은 캠프 때문이라 설명했다. 

“39년 동안 캠프를 통해 수많은 현악주자들이 길러졌습니다. 순수하게 음악을 시작한 사람들은 그 후 다 잘 성장해 주었지요. 처음은 캠프에 학생으로 참가하지요. 그 후에 점차 봉사자로 참가하고, 청년이 되면 상록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참여하고, 성공한 연주자가 되면 지도교수로 참여합니다. 캠프와 인연을 맺으면 후에도 계속 우리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캠프도 점점 좋아지고 오케스트라도 좋아지고 내가 꿈꾸고 있던 또 다른 일들까지 모두 잘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음악이 한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만들어 가는지 캠프의 발전사는 증명하고 있다며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 

캠프에서는 독주와 개인기술 지도가 첫째로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서로의 달란트를 조화시켜 하나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앙상블교육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골짜기 물이 흘러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를 이룸 같이 앙상블은 음악교육의 완성이며 이상이라는 것이다. 동형춘이 이끄는 음악캠프는 모두가 함께하는 음악을 추구하는데, 현악합주용으로 편곡을 해서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성공한 한국형 엘 시스테마(El Sistema: 베네수엘라의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오케스트라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라고 말했다. 클래식음악으로 오늘날의 청소년 교육을 바로 세우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 성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고 있었고 그는 그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캠프에 참가한 저소득층 500명의 초보자 어린이들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교향곡과 가곡, 성가곡 등 모음곡을 합주 초보자들이 쉽게 연주할 수 있게 편곡한 것을 가르쳐 배재대학교 스포렉스홀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그 결과 상상 그 이상으로 모두에게 성취감을 주었고, 공감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 일로 꿈을 가졌고, 연주 후 희망을 가진 아이들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록오케스트라



사람은 본대로 배운다. 가르친다는 것은 자기가 바라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이 믿음 때문에 동형춘은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고, 그 일을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 그의 음악캠프 이름은 ‘상록’이다. 상록은 가르치는 스승의 다른 말이다. 상록음악캠프인 것은 꿈이 있는데도 환경 때문에 배울 수가 없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찾아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상록캠프’는 이런 뜻을 가진 음악전공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캠프다. 대전과 공주를 본거지로 하는 충청지역의 음악교사들이 힘을 합해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캠프를 통해 형성된 동지적 의식을 자신들의 음악활동을 통해 표출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발전시켰고 그것이 음악단체가 된다.

상록오케스트라는 캠프를 시작한 1975년과 역사를 같이한다. 1975년 ‘상록수’처럼 사시사철 변함없는 마음으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돕자는 취지로 초등학교 교사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가 캠프를 열었고, 그 캠프가 해를 거듭하면서 점차 규모가 확대되고 전문성을 갖추며 발전하게 되자, 1976년 상록실내악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실내악단은 캠프의 성장과 함께 성장하다 1979년 오케스트라로 확대 발전했다. 이들 단체는 교회와 소록도, 병원 등을 찾아가 위로와 힐링의 연주회를 여는 선교오케스트라로 그리고 해외에 나가 연주하는 한국 해외 문화사절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상록오케스트라를 상록뮤직 캠프와 관련이 있다고 이해해도 되겠는가?


“상록오케스트라는 캠프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된 음악단체다. 음악을 통한 만남이지만 내 신앙과도 직결된 것으로, 상록오케스트라는 이러한 사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캠프를 통해 가르친다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모인 사람들이 오케스트라를 해보자고 뭉친 것이 상록오케스트라다. 매주 예배와 연습이 있다. 상록오케스트라는 109회 정기연주회와 국내외적인 수백회의 연주, 교도소, 군부대, 소외지역 연주와 국제 문화교류활동을 했고, 1998년 태국 왕실초청으로 왕족과 각국대사들이 참석한 영빈관에서의 연주를 시작으로, 방콕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등에서 연주했다.

그 후 매년 태국에 초청돼 연주회를 가지고 있으며, 태국왕실 해군교향악단과 함께 프렌드쉽 연주회를 15년째 개최하며 부설 예비음악학교와 후아힌의 왕실학교에서 2주간의 워크샵(workshop)을 통해서 태국 학생들에게 캠프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태국 음악도 들에게는 한국음악이 하나의 목표가 되어 있고, 태국음악발전의 지향점이 되어 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한국의 음악이 확산 되는데 이들 단체가 앞장서 길을 열고 있는 중이란 뜻이다.



상록오케스트라가 태국음악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태국에서 상록오케스트라의 음악교육은 한국의 음악교육을 그곳으로 옮겨주는 메신저 같은 역할일 겁니다.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우리의 클래식을 접한 국민들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고, 개종도 하고 안수도 받고 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일이 매번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가 차원을 떠나 클래식 음악을 통해 아시아를 위해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태국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음악인 동형춘을 알고 싶다


바이올리니스트 동형춘 교수는 늘 웃는 얼굴이다. 통 크게 웃는 그의 웃음에는 설명이 없이도 신앙인이라는 느낌부터 생긴다. 그는 한 교회의 장로다. 1946년 생, 공주에서 났고, 대전 대흥초등학교를 다니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발령으로 공주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해 그곳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공부했고, 공주중학교와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운명처럼 서울대 음대에 진학하여 양해엽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그 후 이탈리아 빠스까레 아카데미 지휘과 졸업, 이탈리아 레스피기음악원 지휘과 수료,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음대 지휘과 수료,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지휘과를 연수하고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 등이 되었다. 음악이라는 공부는 본래 끝이 없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공부 때문에 그는 수도 없이 절망하고 좌절했는데, 그가 좌절에 빠질 때마다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가진 신앙 때문이었다. 어렵고 힘든 음악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이끌려 오늘에 왔다. 그는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 전임지휘자를 역임했고, 배재대학 교수로 정년퇴임 했다. 현재는 한국현악협회장, 상록오케스트라 단장 겸 지휘자, 기독교 TV의 방송교향악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로 기독음악인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지난 7월 30일에 한국현악협회를 창립했지요? 왜 창립하셨고, 어떤 단체이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하려 하십니까?


“현악협회에 대한 설명을 먼저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말 그대로 현악협회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모든 현악기 전공자들의 협회입니다. 다 아시듯이 비올라협회도 있고, 첼로연주자협회도, 콘트라베이스협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성공한 단체들을 포함한 단체가 현악협회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악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현악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단계인데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현악인들이 뭐하고 있느냐며 음악계 원로이신 양해엽 교수님이 숙제를 주셨고, 앞장서 일을 만들어주셔서 창립을 이루게 됐습니다. 거기서 회장 동형춘, 부회장 양성식, 이경선, 지진경, 양성원으로 집행부가 구성됐지요”

현악협회가 늦게 출범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독주가 빛나는 악기의 특성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협회 출범과 동시에 현악인들이 자성하게 됐고, 그게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설명을 했다.

“다른 악기에 비해 현악은 독주를 워낙 잘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반대로 합주가 홀대받는 처지가 됐어요. 그러나 음악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앙상블이 가장 중요하죠. 이제 현악협회에서 나서 관현악 앙상블을 활성화 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현악협회는 다른 협회들에 비해 창립이 늦었다는 단점이 있지만 일할 수 있는 실재적인 기반은 다른 모임과 달리 튼튼하게 다져져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번 협회 창립에도 상록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일을 이루어가는 모든 계획의 중심역할도 하고 있어 일을 이루어내는 집중력이나 계획을 완성해내는 능력은 특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협회는 앞으로 한국관악협회와 함께 각종 국내·외 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하는 한편, 전국 현악인들의 창작활동 지원과 음악인들의 직업창출에도 힘쓴다는 계획이다. 동 회장은 협회가 주도해 앙상블 위주의 음악 교육 운동을 펼치며 클래식 저변확대를 위해 힘쓰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협회는 조만간 전문적인 음악 교육과 올바른 문화 정책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라며 "현재 ‘전국현악경연대회’를 준비 중으로 약 70여 팀의 초·중·고등학생 현악 꿈나무들이 첫 대회에 참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현악협회 단독으로 창립기념연주회, 한국현악협회합주단 창단 등을 진행하고 있고, 세계적인 교육의 맥을 집대성하는 현악교육의 제시와 앙상블 문화를 이끌 행복한 클래식의 부흥 작업을 장기계획을 가지고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상록 '뮤직홀리시티'의 꿈

그동안 많은 일을 벌여 꾸준히 이루어오고 있는데, 이런 음악 활동을 통해 이루려는 궁극 목표는 무엇이지요? 대학을 정년한 후에는 세종시에 꿈을 갖고 거기에 세계적인 음악센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소문은 사실이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명칭이 ‘뮤직홀리시티’라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런 구상이 실재합니까?


"1975년 벽지 어린이들의 음악교육과 현악기 저변확대를 위해 '상록수'라는 이름으로 벽지 교사들과 음악캠프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제75회 상록음악캠프를 진행하면서 전인교육을 위한 음악 교육의 확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클래식 음악교육의 전통 확립, 저명음악인들의 재능기부 확산 및 후원 장학사업과 소외지역, 벽지 어린이들에 대한 음악교육 저변확대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결론을 가졌습니다. 지금 말이지만 나는 이 꿈을 40여 년 전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시작하기 위해 2010년부터 대안학교 ‘상록음악예술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시대 아시아와 세계를 향한 청소년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그 일을 마지막 사명으로 알고 꿈을 현실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꿈을 40년 전부터 현재의 세종시를 두고 꾸었고, 그래서 그때에 상당한 땅도 샀었지요. 그러나 그 땅은 정부에 수용돼 현재는 정부 청사가 지어졌습니다.

대신 그 돈이 씨앗이 돼 세종시에 4만평정도의 부지를 붙잡고 ‘뮤직홀리시티’ 구상을 하게 됐던 겁니다. 40년 전 세종시가 생길 줄 세상은 알기나 했습니까? 그런 때에 하나님은 제게 세종시에 땅을 주셨으니 우연은 아니라고 봅니다. 운명이고 사명입니다. 세종시는 ‘뮤직홀리시티’를 통해 세계무대에 설 차세대 음악가를 양성하는 세계적인 교육도시가 될 겁니다. 국제적인 예술인 마을, 국악을 포함한 세계적인 음악 종합마을, 한류마을, 음악 역사박물관, 음악출판사, 음악도서관, 클래식음악방송국, 세계 청소년국제뮤직캠프장, 국제뮤직페스티벌 및 뮤직캠프장 등이 조성되면 세계음악의 중심이 될 겁니다. 저는 빠른 시일 내에 메시아 12,000명의 축제로 시작을 알리려고 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뮤직홀리시티’는 어떻게 완성됩니까? 이 일을 통해 우리 음악은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습니까?


“1, 2, 3차에 걸친 역사를 계획하고 지금 1차 계획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설립 첫 단계로 세종시에 4만 5천평 부지를 조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세종시 ‘상록뮤직홀리시티’ 조성 소식을 듣고 태국인 후원자 두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2점을 보내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 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분들의 기부와 기도가 모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뮤직홀리시티’는 세계 모든 음악인들의 재능기부를 받아 그것을 필요한 학생들, 필요한 음악인들, 필요한 세상에 나누어주고 연결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나갑니다. 이 방식이 지금까지 제가 이루어 온 성공법칙입니다. 재물을 가진 분들은 재물을 기부하고, 재능을 가진 이들은 재능을 기부하고, 건강을 가진 분들은 건강을 기부하고, 권력을 가진 분들은 권력을 기부하고, 다만 우리는 사람들의 기부를 종합하여 세상에 나눠주는 재단의 청지기로서 ‘뮤직홀리시티’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거창하다. 꿈이 어쩌면 너무 커서 그 꿈의 전체를 볼 수도 없어 난감하다고 하자 동형춘 교수가 말했다. 
“꿈은 믿음의 눈으로 봐야 보입니다. ‘뮤직홀리시티’를 보고 지지하는 한 사람이 되기를 부탁할게요” 글·이 제







출처 - 음악저널






[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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