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지막 화자의 고독 - "바깥은 여름" 중 '침묵의 미래'를 읽고 [도서]

글 입력 2018.04.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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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폭발하면 생각도 폭발한다. 시작하자, 두 돌부터!"

2009년 즈음 '신기한 한글나라'는 TV광고에서 이런 카피를 내세웠다. 광고에서는 아직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귀여운 아이가 아빠가 들고 있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 '뜨거운 지구! 갈 곳 없는 북극곰'을 또박또박 소리 내 읽은 뒤 "북극곰이~ 불쌍해. 우리랑 같이 살면 안 돼?"라며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아빠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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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던 나는 옆에서 같이 티브이를 보던 엄마에게 왜 언어가 폭발하면 생각도 폭발하냐고 물었다. 엄마는 "대부분의 생각은 언어로 하는 거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그럼 말을 못 하는 아기는 생각을 못 해?", "좋다, 싫다 하는 감정이나 느낌은 생각이 아니야?" 등의 질문을 이어하고 꽤 인상적인 대답을 들었던 것 같은데 더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그 말만이 뇌리에 깊이 남아 그 뒤에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약 5년 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언어 학도가 되었다. 두 사건을 이렇게 이어 서술하니 마치 2009년의 짧은 대화를 통해 언어에 대한 깊은 흥미를 느낀 내가 언어에 대한 뜨거운 열망으로 언어학을 전공하리라 마음먹은 것 같아 보이나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고, 이는 그저 어려서부터 경영, 통계, 공학 같은 분야에는 관심이 없던 고3 학생이 한 대학의 인문학부 학과 목록에서 발견한 학과에 원서를 넣은 결과였다. 졸업을 앞두고 돌아보니 참 잘 맞는 전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험기간에는 대부분의 대학생이 그렇듯 내 전공을 저주(?)하고 언어학의 창시자들을 욕했지만, 사실 언어학의 많은 분야는 내 취향에 딱 들어맞았고 의미론과 통사론과 기호학 등의 원론 강의들은 지적 욕구를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었다. 인문학 중에서도 가장 인문학다운,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일단은 그래 보이는 학문을 공부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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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자체를 공부하고 나니 언어에 대해 얘기하는 좋은 문학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좋아하는 주제라 작품 자체에 더 애정이 가기도 한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 <침묵의 미래>는 거의 사라져 가는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중앙에서는 사라져 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소수언어박물관을 건설했고, 그 안의 기숙 시설에서 천여 개의 언어를 가진 천여 명의 마지막 화자를 보호하고 있다. 보호라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이 곳으로 실려 왔고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끊임없이 항의하며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중앙에서는 모든 화자의 동의를 얻어 이 시설에 거주시켰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상 이미 거의 사라진 언어의 유일한 화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정책을 설명하고 어떻게 동의를 얻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소설에서의 시점은 이미 박물관이 설립된 지 몇십 년이 흐른 뒤이기 때문에 이제 호기롭게 저항하던 이들 대부분은 아주 늙고 피곤한 언어 표본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 부족의 생활 방식을 재현한 전시실에 조악한 전통의상을 입고 앉아서 가끔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언어를 한두 마디 들려주는 일을 한다.


중앙은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호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 단지를 세웠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그건 중아에서 내심 바라는 바였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두 계산된 거였는지 몰랐다. 오늘도 이곳에선 오래된 언어 하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보름에 한 번 꼴로 일어나는 일이라 이제 놀라는 사람도 없다.


소통의 기능을 잃은 언어는 무엇이 되는 걸까? 특이하게도 이야기의 화자는 '언어'다. 마지막 화자를 지금 막 떠난 언어가 들려주는 길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면 숨이 막힌다. 박물관에 수집된 마지막 화자들의 숨 막히는 고독이 읽는 이에게까지 전이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내뱉는 말을 듣고 이해하는 이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 책에서는 이곳 화자들이 다양한 신체적 질병 외에도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간다고 묘사된다. 그건 '말을 향한, 말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이다. 누군가는 자기네 나라말로 무심코 '천도복숭아'라고 말하며 울고, 어떤 이는 '종려나무'라고 한 뒤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낀다. 천여 명의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모국어에 갇혀 산다. 그들의 언어는 한때 소통의 도구였지만 이젠 말을 통해 소통할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 고독하다. 의사소통은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언어가 생겨난 기본 목적이다. 소통할 도구는 있는데 소통할 이가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고 고독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언어학을 전공한다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어느 언어를 전공하냐고 물어본다. 하도 많이 받은 질문이라 나는 그냥 특정 외국어가 아니라 언어라는 것 그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만 가볍게 설명하고 만다. 이런 대화가 있고 난 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언어 자체를 탐구한다는 말 자체가 비전공자에게는 약간 낯설게 다가갈 수 있겠다 싶다. 외국에서야 언어학이 철학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인문대학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전공이지만 한국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 중 기껏해야 두 개 대학에서만 독립 전공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언어 자체를 학문의 대상으로 두고 탐구할 때 그 탐구 역시 언어로 행해진다. 개별 언어에 대한 접근과 분석의 내용을 적은 도구는 메타언어적으로 사용된 언어다. 관념적인 체계로서의 언어를 말할 때도 언어가 사용된다. 다른 어떤 학문과도 구별되는 언어학만의 특징이다. 탐구 대상을 탐구하기 위해 탐구 대상을 도구로 사용하는 학문. 역사와 생물학이 언어로 기술되는 것처럼 언어학도 언어로 기술된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도구적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소통의 도구라곤 하지만 언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다른 도구들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도구라면 마땅히 그것 사용하는 주체가 목적을 위해 통제하며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언어는 도구이면서도 인간이 그 도구를 조망하면서 통제하고 재단할 수 없다. 한번 언어를 깨우친 인간의 사고는 대부분 언어로 이루어지고 행해지며, 언어 없이 세상을 직관적이고 비선형적으로 느끼던 때를 다시는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차원 세계에서 점, 선, 면과 부피만 보며 사는 우리가 공간 너머의 차원을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없듯이 언어를 거치지 않은 사고를 떠올리기란,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나와 읽는 여러분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내 마지막 화자는 그런 말들에 휘둘리지 않으려 가급적 입을 닫고 살았다. 하지만 실종 뒤 오랫동안 보이지 않다 어느 날 불쑥 강물 위로 떠오른 시신처럼, 무언의 주장처러, 굳이 입을 떼지 않아도 내면에 떠다니는 온갖 상념이 그의 목울대로 솟아올랐다. 그에게 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 졌다' 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어로 이루어진 사고체계를 습득하기 시작한다는 건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재단해 인식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인간 사고가 언어에 완벽히 종속된다는 워프(B.Whorf)의 주장은 현대 언어학에서 부정되고 있지만,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느 부족의 언어는 성조가 수십 개다. 그들은 어느 열대지방에 사는, 빨갛고 쭈글쭈글한 멱을 가진, 화려한 희귀 새처럼 운다. 이방인의 귀엔 그저 "크, 크헉, 흐허, 헉"처럼 들리는 소리가 어떻게 숨나 가지 문장으로 확장되는지 나도 알지 못한다. 어느 부족의 시제에는 전생과 환생이 들어간다. 그런 건 누가 정하고, 어떻게 설득하는지 다른 부족은 조금도 가늠 못한다. 어느 나라 동사는 백오십 번 아상 몸을 바꾼다. 그것은 프리즘에 닿은 빛처럼 여러 갈래로 꺾이며 굴절된다. 단어가 소리에 반사돼 정신에 무지개를 비춘다. 어느 민족에게 사랑은 접속사, 그 이웃에게는 조사다. 하지만 또 다른 부족의 경우 그런 건 본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하여 아무런 명찰도 달아주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 '보고 싶다'는 한 음절로 족하다. 하지만 다른 부족에게 그 말은 열 문장 이상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다.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


영어의 love는 동사지만 한국어에서 '사랑'은 '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l love you는 사랑해로 번역되지만, 해야 하는 사랑과 동사 love 가 의미하는 범주는 절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접속사인 사랑, 조사인 사랑은 다 다른 사랑이다. 그들이 느끼는 그 감정은 모두 다른 감정이다. 언어 상대성 가설을 이야기할 때 너무 자주 사용되는 뻔한 예시지만, 이누이트 언어에는 눈의 여러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별개로 존재한다. 눈의 모양이나 상태를 한국어나 영어보다 훨씬 세세하게 나누고 있는 것은 물론이며 땅에 떨어진 눈, 눈더미, 쌓인 눈, 내리고 있는 눈을 의미하는 각각의 단어가 존재한다. aput( 떨어진 눈)을 보라고 말하는 것과 떨어진 눈을 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한국인은 탁자에 사과가 있다고 말하지만, 영어 화자는 '저기에 한 사과가 있다'라고 말한다. 둘이 보는 것은 다른 세계다.

누구도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모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혼자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미쳐가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단적인 고독의 한 방식을 몇십 년째 견뎌내는 중이니까.


[이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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