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토록 어른이 되고 팠던 아이 - 레이디 버드 [영화]

글 입력 2018.04.1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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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게 되어서보다는, 좀 덜 어리숙하고 더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든 다 알지는 않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바라던 나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척 멋있어질거라고 생각했다. 뭐, 다들 그렇겠지만 시시했다. 술을 마시고 운전면허를 딸 수 있게 되고, 투표를 하게 되었다. 마치 책에서 보던 유명한 그림이나 건축물을 눈 앞에서 본 느낌이었다. 이게 진짜 존재하는구나, 그림이랑 똑같네. 그 생경한 느낌.

 젊은 애가 뭘, 이러겠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자주 아프다. 비웃지 마시라. 비가 오기 전날이나 무척 흐린 날에는 몸이 저릿저릿하다. 마음도 예전보다 쉽게 아프다. 약해진 건 아니고 여태까지 강하고 싶었던 모양. 예전엔 영화를 봐도 눈물이 고일락 말락하다가 사라져버렸는데 요즘엔 가끔 오래 고여있다 떨어지기도 한다. 공포영화에 대한 생각은 마찬가지다. 소리에 민감해서 괴롭다.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겁에 질려있고 두려워하고, 그걸 보는 나도 고통스러워서 괴롭다. 그러니까 머리가 좀 삐걱거리고 돌아가고, 몸이 자주 아프고, 좀 더 자유로워지고 좀 더 불안정해진 것 빼고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재미가 있진 않다. 누가 알았겠는가. 어른이 된다는 건 혜택보다 책임이 더 많은 승진같다. 배보다 배꼽이 큰 듯도 하고. 나를 잃지 않고 나답게 살면서도 남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 모순적인 과제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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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이디 버드>. 지긋지긋한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으로 가기까지의 여정.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는 과정.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이 되는 과정. 사실 그리 새롭진 않다. 흔한 하이틴 영화와 구조가 비슷하다. 그런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그녀에겐 평범한 듯 특별한 구석이 있다. 첫 눈에 반하기도 하고, 남친과 헤어져 펑펑 울기도 한다. 섹스가 특별하길 바라고 있지만 별 거 아니라 허망해하기도 한다. 부잣집을 동경하고, 친구 사이에서 이간질한다. 하이틴 영화는 무척 고민스러운 부분은 잘 피해가는 버릇이 있다. 고민이나 틀어졌던 사이가 갑자기 멋지게 풀려버린다. 그리고 대체로 여자주인공은 고민에 비해 실행력이 처지는 편이고 멋진 남자주인공이 해결해주는 편이다. 현실에선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모든 게 내 맘대로 한 번에 풀리지 않아서,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당히 적극적이고 진솔해서 이 영화가 좋다. 그녀는 가족에게는 무척 이기적인 사람일 것이다. 친구들이랑 노느라 가족은 뒷전이고, 열받으면 형제고 나발이고 없다. 익숙해서 소중한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잘 모른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굽히고 말 잘듣는 딸이 되거나, 혹은 하고 싶은 걸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선택지. 그녀는 후자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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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연애사만 봐도 그렇다니까. 그녀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다가갔다. 부끄럽더라도 말을 건다. 지켜준다며 진도를 나가지 않던  첫 남친 대니가 남자와 키스하는 걸 보고 슬프게 헤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괴로워하며 말하지 말아 달라며, 스스로 말할 시간을 달라는 그를 포근히 안아준다. 남친은 아니지만 계속 그들은 좋은 사이로 남는다. 말이 쉽지, 그러기 쉽지 않다. 나른한 퇴폐미가 매력인 두번째 남친 카일. 그는 세상을 거시적으로만 본다. 전쟁, 국가와 개인 같은 크나큰 이슈에는 관심이 있지만 개인의 감정에는 무심하다.(대체 그는 그녀를 좋아하긴 한걸까? 누굴 좋아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건 이쪽이다) 졸업 무도회를 갑자기 파토내버리는 그와 그녀는 깔끔하게 헤어진다. 울적해하는 베스트프렌드 줄리와 한껏 수다를 떨고 무도회에서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기는 그들이 멋있다. 졸업무도회에 반드시 남녀 한쌍으로 가야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는 것 역시 편견 아닌가. 즐겁고 정다우면 그 뿐. 다리 앞에서 둘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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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둘러싼 세상엔 공감이 많이 된다. 나 역시 그녀 입장이었다면 새크라멘토가 지겨웠을 것이다. 나는 그릇이 너무나 크고, 더 큰 곳에서 가서 즐기고 싶은데 여기서는 그게 어렵다고 생각했을테니까. 그녀의 자기소개서를 보고 새크라멘토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는 말에 무척 어이없어 했는데, 싫어하는 것도 사실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다. 구체적으로 싫어하려면 모순적으로 구체적으로 대상을 알아야 하기 때문. 애정 중에 애(愛)는 아니더라도 정(情)은 있었을 거란 말씀. 막상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어도 아직도  우리 동네가 가장 좋다. 아주 새로운 것들을 찾아 나설 때 빼고는 우리 동네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이 제일 편안하고 즐겁다. 별거 없는 동네인데 말이다. 그래서 정이란 게 무섭다. 편안하다는 건 상당한 무기다. 마치 타고난 살 냄새가, 공기가, 물 맛이 그리워지는 느낌.

 미국에서 입시를 해보지도 않았고, 미국에서 중산층 혹은 그 이하 언저리의 개념이 없었다. 고3때는 한국 말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자랐으면 좀 창의적이었을라나 싶었다. 미국 영화에는 대부분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영화가 많았고 어떻게 먹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립은 학비가 무척 비싸고 우리와 비슷한 듯 다른 교육제도가 있다는 것. 그녀의 가족은 그렇게 고생을 한다. 엄마는 병원에 출퇴근하면서 빨래 돌리기 바쁘고, 아버지는 실직하시고 젊은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괴로워하고, UC 버클리를 나오고도 가게 알바를 하고 있는 오빠와 오빠의 여자친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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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맞다. 우리만 먹고 살기 힘든거 아니었지. 헬조선이 있다면 어디 다른 헬도 있겠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 놈의 나라 뜨고 만다며 이 가는 사람도 많을 거다. 먹고 사는 문제는 전세계적인 문제였지. 대학 나왔다고 돈벌이 걱정하지 않던 시대, 꿈을 이뤘다고 미래까지 안정되지는 않는 시대. 어머니의 매몰차 보이는 말은 사실은 속상하고 미안한 말이었다. 책 한 권을 사서 집에서 편히 읽는 건 부잣집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마음 같아선 딸아이를 위한 책이 가득 찬 서재라도 만들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일 것. 어른들은 뭐가 늘 미안하다. 세상이 그들을 미안하게 만든다. 부모가 된 어른들은 밖에서 돈 버느라 미안하고, 아이들 기르기가 벅차서 어른들의 부모님 고생시켜서 미안하고, 집 안에서는 가족들과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라고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된 것도 아닌데. 미안해야만 한다. 열심히 살아도 미안하고, 미안하지 않은 것에도 미안해야 되는 게 어른의 조건이었다. 그걸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누가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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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슷한 경험이 많아서 웃기기도 하고 먹먹하기도 했다. 그녀처럼 내가 마음에 드는 옷과 엄마가 마음에 드는 옷이 달라서 다퉜던 적이 있었다. 결국 영화처럼 엄마가 그 옷을 사주셨었지. 그녀처럼 엄마한테 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냐면서 다 갚고 연 끊자는 식으로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속으로는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빚 갚고 이 놈의 집구석 뜬다 이런 생각. 생각보다 나를 키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들고 내가 그만큼의 돈을 갚는데는 많이 걸린다는 걸 알았다.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중고등학교때부터 애를 썼는데 그 때 알았다. 그 돈 조금 아끼는 것도 그렇게 힘들다는 거. 말 안 하길 잘했다. 누가 돈이 돌고 돈댔나. 내 세상만 돌게 만든다.

 원하던 뉴욕의 대학교에 대기자 명단에 올랐다가 합격하고 본격 뉴요커가 된 그녀는 생각보다 심심해한다. 뉴욕과 그녀는 분명 잘 어울리는데 아무래도 좀 허전한 모양이다. 그녀에겐 엄마도, 새크라멘토도 그런 존재다. 같이 있으면 부딪히는데 없으면 그립다. 엄마와 떨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친구들에 비해 가족에겐 좀 까칠했던 그녀가 엄마에게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한편으론 대단하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여즉 못했는데 엄마는 너무 자주 말하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중에 적재적소에 꼭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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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어지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몇 가지 그녀가 엄마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된 것들. 크리스틴이란 이름이 참 예쁘다는 것, 차를 타고 보는 새크라멘토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 레이디 버드, 그녀가 지은 이름은 새크라멘토에서는 마구잡이로 쓸 수 있었지만 뉴욕에 도착하고 나니 입을 거쳐 나오는 이름은 크리스틴이었다. 늘 엄마에게 레이디 버드로만 불러달라고 했고, 주변 사람에게도 레이디버드로 많이 불렸으니 그게 더 익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뉴욕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들은 크리스틴이란 이름은 어색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던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오, 이름 예쁘다 크리스틴, 나도 그런 이름 가지고 싶어, 이런 말을 꽤나 했을지도 모르지. 무슨 이름이든지 이름때문에 나를 규정짓는 게 생긴다거나 이름이 바뀐다고 내가 바뀌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은 똑같았을 것이다. 별명은 좀 달랐겠지만 나는 여전히 나였을 테니까. 영화 제목이 레이디버드였든, 크리스틴이든, 레이첼이든, 상관이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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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면허가 없는 나는 알 수가 없지만 그녀는 어색한 안전벨트와 핸들, 브레이크를 느끼면서 문득 엄마 생각을 했다. 엄마는 병원을 출퇴근하는 도로에서 새크라멘토의 풍경을 보면서 매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분이 어땠든 어느 도로에서 바라본 풍경이 몰랐는데 참 아름답구나. 나의 엄마도 외할머니가 했던 말이 세월이 지날수록 참 맞는 말이라고 얘기하신 적 있었다. 나는 엄마 말도 참 맞는 말이 맞다고 했다. 세상 사는 데는 다른 것보다 역지사지가 필요하다. 내가 좋으면, 내가 슬프면 상대방도 좋고 슬프니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약간 손해보는 듯 사는게 결국은 남는 거란다. 그런 말. 그녀 혹은 내가 자취생활에 익숙해지고 어쩌면 엄마가 되었을 때 더 다가올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녀 같이 매몰찬 소리를 하는 딸이라도 있다면 갑자기 아이고두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우리 엄마는 어땠지. 엄마의 엄마를 보고 나는 저런 엄마가 되지 말아야지, 우리 아이는 나같이 키우지 말아야지 했나보다 하고. 오방도깨비같은 딸의 방을 보면서 이래서 자꾸 정리하라고 했나보다.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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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틴이라 불리고 레이디 버드라고 스스로를 부르던 아이는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야한 잡지도 사보고, 담배도 사고, 술도 사면서 점원에게 어른이 되어서 사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재밌는 친구. 술먹고 토하고 응급실에서 잠이나 자고 오는 이 유쾌한 친구가 여전히 매력적인 건 그녀가 철이 들어서가  아니다. 철이 든다는 건 마치 역사는 반드시 진보한다 같은 일방향성 논의 아닌가. 아이는 늘 미숙하고 철이 들어  어른이 되면 완전히 성장하는 건가? 어른이라고 다 어른이 아니고, 아이라고 다 아이가 아니다.  그녀가 매력적인 건 그녀답게, 크리스틴답게, 레이디 버드답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일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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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아이, 어른이 되었는데도 아이라 부르는 '어른들'이 있다.

말대답, 말대꾸라는 말을 싫어한다. 말+대답, 말+대꾸. 어차피 말하고 답한다는 뜻인데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버르장 머리 없이 치기 넘치는 하극상 발언을 한다는 느낌으로 쓰인다. 자유롭게 의견을 말해보라고 하면서 어른아이의 자기 주장은 웃어른에게 반항이자 말대답에 불과하다. 1절만 하고 끝내려고 영혼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네 하는 대답이 만족스러운 거라면 서로에게 상당한 비극인데도. 어차피 설득되지 않을 바에야 들어줄 말은 다 들어주고 할 말은 다 하고 시작하자. 서로 속이라도 시원하게. 궁지에 몰렸을 때 상대의 지위나 나이 등 약점을 공격하는 대신 생각의 약점을 공격하는 걸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어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셨는지는 알지만 피부로는 와닿을 수 없다. 자신의 고통이 다른 세대의 고통보다 더 힘겨웠다고 알리고 싶다면 차라리 더 인자하고 부드럽게, 우리가 존경할 수 있게 해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힘든 '어으으른생활'에 뭘 더 바라겠냐만은. 말이야 늘 쉬우니까 그냥 희망사항이다. 더 잘 듣고 말하고 싶어진다. 나중에 내가 어른들의 '어른들'이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이었으면 해서.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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