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장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뱉어내는 가장 격렬한 사랑, 연극 춘향

글 입력 2018.04.10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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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가 몽룡이를 잡은
결정적 요인은 밤기술이었대.
기생의 딸이잖아? 

소설을 속에 묘사되는 춘향이의 솜씨가
처음으로 보기에는
너무 능숙하다는 거지.

춘향이는 정조의 대명사가 아니라,
몽룡이를 잘 잡아서 신분상승 하려던
현실적인 인물인거야.


대학교에 처음 입학하고서 학회를 골라야했을 때 한 선배의 말에 이끌려 고전문학회에 들어가게 됐다. 당연히 지고지순함의 대명사라 생각했던 춘향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었다는 해석이 너무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지고지순함, 사랑이란 이름 등으로 지워왔던 춘향의 욕망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그때 처음 춘향을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닌 욕망을 지닌 ‘인간’으로 인식했다. 이번 떼아뜨레 봄날의 ‘춘향’은 내게 그 선배의 말과 같은 작품이었다. 교훈을 주기 위해 착하기만 하고 나쁘기만 했던 인물들에게 실질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고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일 뿐인 ‘인간’들로 묘사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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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극 내에서 가장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인물이다. 마음에 드는 이에겐 거리낌 없이 ‘자자’고 요구하는가 하면,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남성의 구애에겐 조건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이몽룡이 떠날 때도 약간의 슬픔은 보이지만 이내 가버리라며 보내주는 모습을 보인다. 이 극중에서 춘향은 남성들에게 선택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성들을 선택하는 존재였다. 춘향이 누군가랑 자거나, 자지 않거나, 혹은 벌을 받는 그 모든 것들은 다 춘향의 선택에 의해서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움직이는 존재인 것이다.

약간은 어눌한 말투를 구사하는 이몽룡은 어머니의 권속을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단 한번, 춘향을 만나 어머니와 다른 선택을 하고자 했으나 결국 좌절된다. 어머니의 의지에서 벗어난 그의 선택은 춘향 단 하나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좌절되며 용은 지렁이가 되어버린다. 이몽룡은 온갖 고난을 이기고 춘향과 사랑을 쟁취하는 인물이 아니라,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무너지는 나약한 인물이다. 그리고 무너진 채로도 춘향을 찾아오고야 마는 가련한 인물이다.

춘향 다음으로 가장 큰 변화는 변사또다. 대개 춘향전에서 변사또는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떼아뜨레 봄날에서 변사또는 오히려 춘향에게 가장 순수한 열정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춘향이 ‘자되 자지말자’고 하니 그 긴긴 밤을 지새면서도 춘향을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춘향이 그 정성에 감동할 때 까지 몇날 며칠이고 말이다. 하지만 춘향이 그를 좋아하기 시작하자, 변사또는 ‘나를 싫어하는 네가 좋다’고 말한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상대를 바라볼 때의 그 애타는 마음, 긴장감이 좋다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열정을 지닌 존재이면서도, 마지막엔 춘향을 사랑하지 않는 존재. 춘향의 요구에 의해 춘향을 괴롭히는 존재. 떼아뜨레 봄날의 변사또는 무척이나 입체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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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저렇게 예쁘고 예쁘고 또 예쁠 수가.
끝났어. 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실제
낳고 기른 은혜일랑
까맣게 잊고서 나는 불효자.


하지만 연극 ‘춘향’은 각 인물들의 욕망을 그려내면서도, 그들의 감정선 자체는 최대한 절제하는 방식을 택한다. 각 인물들은 마치 허공을 향해 말을 뱉듯이 대사를 친다. 이는 춘향과 이몽룡의 첫만남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의 첫만남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다. 이몽룡은 춘향을 보며 예쁘고, 예쁘고, 또 예쁘다고 하지만 정말 경탄스럽다는 느낌이기보단 고장난 로봇같은 느낌을 준다. 춘향 또한 몽룡에게 끌림을 느끼지만, 그 감정 또한 ‘자자’고 말하는 것으로 표현될 뿐. 목소리 톤에는 큰 변화가 없다.

욕망을 위해서 움직이는 인물들을 묘사하며, 그 행동이나 말투에 있어서는 최대한 그 욕망을 배제시킨다. 이 아이러니함은 어떤 장면에서는 웃음을 유발하는 반면 어떤 장면에선 슬픔을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봤어. 용이 지렁이가 되는 꿈을.


평소와 다름없는 톤으로 뱉어지는 춘향의 대사는, 끝내 춘향 옆에서 무너지는 몽룡의 모습 때문에 그 비극성이 극대화된다. 계속해서 관객석을 응시하는 춘향의 눈빛은 매 순간 강렬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기에 어느 순간엔 당돌하고 어느 순간엔 처연하기 그지없다. 배역을 맡은 이춘희 배우의 내공과, 이를 끌어올려 준 연출의 적절한 조화다. 때문에 관객들은 무미건조한 그들을 보면서 울고 웃을 수 있던 것이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각각의 인물들의 감정을 풀어내 보이고 싶었다는 기획의도처럼. 연극을 보고 나서는 길에 어떤 강렬한 이슈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언어로 정제되지 않는 멜랑꼴리한 감정의 잔재들이 마음에 남고, 계속해서 극을 곱씹게 되는 느낌이었다. 변사또에게 차라리 괴롭혀달라는 춘향에, 무너지는 몽룡에 마음이 아프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목 끝에서 일렁이는데 그 감정이 언어로 뱉어지지는 않는다. 그 애매한 답답함. 그 답답함에 몇 번 더 극을 곱씹어 보다, 이런 감정이야말로 사랑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인지 모르게 하는 감정의 최선봉에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니 말이다.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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