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안에도 함께 가야만 하는 ‘버려진 곰’이 있으니까 : 연극 < 처의 감각 >

글 입력 2018.04.0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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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예술센터 2018 시즌 프로그램"
처의 감각

극 고연옥 / 연출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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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nopsis >

숲에 버려진 한 남자가
동굴에 혼자 살고 있는
한 여자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그녀는 숲에서 길을 잃은 뒤
한때 곰과 살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기를 낳았으나,
사냥꾼에게 발견되어 아기는 죽고
곰 남편과도 이별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룻밤의 동침으로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 여자는
그를 따라 도시로 떠나고,
그들은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생활을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에 점점 지쳐가고,
여자는 인간들의 잔인한 본성에 환멸을 느끼며
점점 집안으로만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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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약자의 감각을 깨닫는 것. 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에 관한 서사.

  이 연극이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연극은 ‘곰의 삶’ 즉, 약자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적 세계를 바탕에 깔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곰아내’였던 여자와 ‘곰남편’이 바로 그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곰남편’의 실체는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타자의 고통에 둔감하여 자신의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곰자식'을 빼앗긴 후, 인간 남자와 새 가정을 꾸린 주인공 여자에게만 곰남편의 존재가 느껴질 뿐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싣고 온 멀고 아득한 냄새처럼 어렴풋이.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식 둘을 낳고 가사노동 외에는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서야, 인간 세계 속에서 불구가 되어서야 ‘인간’으로부터 추방당한 ‘곰남편’이 느꼈을 아픔을 통감(痛感)하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
  
  작품은 웅녀신화로부터 ‘인간의 반은 곰’이라는 설정을 빌렸다. 그래서인지 신비스러우면서도 통통 튀는 연출들이 자주 등장한다. 토템의식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강렬한 몸동작과 구음이 종종 구사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보여주기 위해 꿈속에 있는 듯한 몸동작이나 목소리 에코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고대의 느낌과 신화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잘 녹아 있어 전체적으로 엄숙한 분위기도 감돌지만, 김정 연출가 특유의 괴이하면서도 발랄한 디테일들은 다양한 장면들에서 예측할 수 없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장면을 전환할 때마다 새로운 장을 알리는 배우들의 야무진 구호,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누가 봐도 스태프’인 사람(등장 인물?)의 역할, 극의 맥락과 관계없는 돌발성 대사들, 2D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면 연출, 과감한 조명 사용 등. 연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연극보다 구체적이고, 특이하고,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이 연극의 모든 면을 막힘없이 즐기지는 못했다. 스토리의 측면에서는 의문점이 남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다시 꺼내 보는 슬로건.


1. 약자의 감각을 깨닫고
2. 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에 관한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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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가장 큰 의문은 ‘극이 상정한 약자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것이냐’는 것이다. 문명과 비문명. 인간과 동물. 남성과 여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어른과 아이. 물론 어떤 캐릭터를 두고 계급이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좀 더 유의미한 힌트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이 극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기준은 문명과 비문명/ 남성과 여성 정도인데, 사실 그들이 어떻게 차별을 받고 어떤 개별적 정체성을 갖고 있고 왜 그들이 약자인지에 대한 암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없다. 그저 ‘곰’적인 것은 인간에게 핍박 받는다. ‘곰’적인 것을 탈피한 여성은 불구가 되고 억압받는다. ‘곰’적인 것을 외면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는 인간은 불행하다. 구체적인 예시로 나타나는 것은 사냥꾼의 손에 곰자식이 두 동강 나서 죽임을 당하고 인간 남자와의 삶이 불행하다는 정도다.
     
  두 번째, 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방법이 왜 ‘곰의 감각’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약자가 약자의 정체성을 갖고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약자 스스로 자신의 안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약자가 약자로 상정되는 이유는 권력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일 텐데, 극에서 여자가 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장면은 강자가 처벌 받는 것도 아니요, 강자가 회개하는 것도 아니요, 약자가 상처를 치유하게 되는 것도 아니요, 약자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시 여자의 앞에 ‘곰남편’를 찾기 위한 끝없이 머나먼 여정이 펼쳐질 뿐이다. 그러니 여기서 질문을 또 하나 더 던질 수 있다.
     
  한 여자가 고통 속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진짜 제대로 된 남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인가. 물론 ‘곰’을 찾는다는 것은 단지 남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원의 감각을 되찾자는 ‘치유의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작품이 말하는 쪽은 그 의미가 더 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그렇게만 이해하기가 싫다. 여자가 곰자식을 잃은 상실감으로 동굴에서 은둔생활을 할 때 그녀를 그곳에서 탈출시키는 것도 남성(구원자)이었기 때문이다. 약자라서 그렇게 의존적이어야 하나. 사람에게 상처 입었는데 사람에게 그렇게 휩쓸리기 쉬운가. ‘곰의 감각’을 각성해야하는 자는 여자가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문명사회'와 '남성'이다. 곰과의 관계에서 아이까지 낳아본 여자라면 이미 ‘곰’과 가장 깊은 소통을 해본 유일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녀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해답을 알고 있을 사람인데 어째서? ‘약자’의 정체성을 지녔다고 해서 너무나도 전형적인 약자로만 나타나야 하는가.
    
  심지어 주인공 여자는 스스로 원해서 곰과의 관계를 차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곰의 세계가 잃어버린 아니, 인간에 의해 강탈당한 ‘포로’다. 그런데 그 포로의 신세를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각성하고 깨닫고 울부짖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자신의 피를 흘려 낳은 인간의 새끼를 죽임으로써 인간 세계에서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서 말이다. 내 잘못이 아닌 것을 위해 내가 울고 내가 발버둥 치는 운명이라니. 가혹하다. 끝까지 인간 남성은 ‘쉽고 가뿐하게 떠날 수 있는, 무지해도 되는 권력자’로 남고.
  
  약자가 되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살인’과 ‘불구의 경험’을 거쳐야 하는 길이라면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인간적인 일이 아닌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서도 버티는 여정을 보여줬어야 했다.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캔디처럼 굳세게 버티라는 게 아니다. 여전히 ‘약자’의 정체성을 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혹은 누군가의 부축 없이 ‘곰의 세계’로 홀로 걸어간다 하더라도, 그 모든 연약한 삶들이 자신이 가진 가장 무른 것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지켜내는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모습. 그런 모습을 나는 보고 싶었다는 거다.
   
  희곡 원본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스토리를 구구절절 따질 수는 없다. 작가는 내가 불만을 갖고 있는 부분들을 이미 충분히 사색해 보았을 수도 있다. 이야기가 무대로 옮겨지는 과정 속에서 연극적인 서사를 따라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나 내가 느낀 불편함과 아쉬움이 터무니없지는 않다고 본다. 내 안에도 함께 가야만 하는 ‘버려진 곰’이 있으니까. 달래야 하는 무거운 몸뚱이가 내 안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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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정보>


처의 감각
- 남산예술센터 2018 시즌 프로그램 -


일자 : 2018.04.05(목) ~ 04.15(일)

시간
평일 8시
주말 3시
월 공연없음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
서울특별시

주관
(재)서울문화재단
프로젝트 내친김에

제작
남산예술센터
프로젝트 내친김에

관람연령
만 13세이상

공연시간
120분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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