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모두가 모두에게 인간일수 있도록,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

글 입력 2018.04.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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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디까지나 ‘개인’이란 세계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무리 타인을 이해하려해도 절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모든 사고는 ‘자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세계의 중심은 ‘나’다. 나를 바로 세우는 게 내 세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고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며 ‘나’만을 강조하며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내 세계의 중심이듯, 타인 또한 타인의 세계의 중심이다. 타인들은 내 삶에 존재하는 NPC가 아니며 모두가 각자의 삶의 주인공이다. 인간 각각은 하나의 우주에 비견될만 하며, 그 우주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렇기에 타인을 최대한 이해하려 애쓰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살아나가야 한다.
 
위 두 문단은 ‘인간’이란 존재의 기본이다. 그래서 타인을 함부로 매도하지 않아야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스스로에겐 가장 애틋한 사람일테고, 저 사람 주위엔 한명이라도 저 사람을 소중히 여길 누군가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바로 감정노동을 할 때다.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는 이 상식과 기본이 통하지 않는 세계,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 세계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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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옹립해야만 내 세계가 바로 선다고 할지라도, 감정노동을 할 때는 ‘나’를 계속해서 죽여야 한다. 자신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여야 ‘능력 있다’고 인정받으니 말이다. 나를 죽이면 죽일수록 이 사회에 생존하기 더욱 적합해져 가는 것이다.


“어떻게 그걸 참을 수가 있어요?
저는 이해가 안돼요!”
“이해하려고 하지마! 그냥 괴물들이야.”


타인을 매도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는 구호와달리, 그들의 마음은 단절돼있다. 서로는 서로를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타인들은 ‘진상’이란 이름의 괴물로 둔갑한다. 그들이 ‘나’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쯤으로 대하는 그 순간엔 나 또한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야 버틸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이가 같은 인간이라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은, 감정노동직에선 유독 괴물과 도구로 만나게 된다. 감정노동직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일 수 없게 된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줘요~
신속, 정확, 친절!”
“사랑합니다, 고객님.”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감정노동자들에겐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괴물이 마구 때리는데도 공격을 막아낼 방패가 없는 것이다. 무기가 없음은 당연하다. 괴물에게 그다지 큰 타격을 입히지도 못할 맨주먹조차 꽁꽁 묶여있다. 그저 맞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쉴 틈도 없이 다음 괴물을 상대해야한다.

콜센터 직원들이 고객들의 전화를 받는 장면들은 정말이지 괴물들과의 싸움을 보는 듯 처참했다. 고객이 아무리 욕설을 내뱉어도 그저 웃어야 한다. 성희롱에도 바로 화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죄송하다고 말해야한다. 너무 힘들어도 쉴 시간조차 없다. 바로 다음 고객을 상대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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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방패를 주지 않았기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를 방패로 만드는 것이다. 웃는 얼굴 뒤에 진심을 숨기고, 괴물들의 공격이 진심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을 죽이는 것 또한 그 방패였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이들에게 웃어보였던 미소가, 그들 스스로조차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고있다는 의미로 느껴져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만들었던 그 방패는 그 뒤에서 서서히 스스로를 죽여간다.

정말 ‘괜찮은’줄로만 알던 엘리트 직장 동료 지은의 고통에 겹쳐지는 콜센터 직원들의 미소는, 그 미소야말로 지은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임을 암시한다. 마음 속에는 빨간 불이 켜졌는데, 마음은 살려달라 간절히 외치는데 그 위를 미소가 덮는다. 그 미소는 마음이 숨쉴 곳이 없게 만들고 결국은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 생존을 위한 미소는 결국 스스로를 죽여갔다.
 
연극에 폭력적인 장면은 하나도 없었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이야기를 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또한 겪어봤고, 겪을 일임은 물론. 그 어느 순간에는 내가 ‘도구’였고, 그 어느 순간엔 내가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그 폭력들을 마주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씁쓸하고 또 마음 아팠다.

한 콜센터에서 통화대기음으로 ‘지금 전화를 받는 직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고 엄마’라는 멘트를 넣자 강성 고객의 비율이 줄어들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상대가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상대라서, 인간이라서 존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일 수 있기 위해선 앞으로 무엇이 변해야할까. 일단 나부터가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많은 직원들에게 보다 친절하게 굴 것을 다짐하며 모두가 모두에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어느날을 그려봤다.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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