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말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영화 < 그녀 > [영화]

글 입력 2018.04.0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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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한다. 비가 왔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우리는 거하게 영화를 보며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그녀>와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 영화 두편을 연달아 봤다. 나는 그 때만 해도 같이 영화를 본 언니가 무척 좋았다. 과거형이라 어쩌면 속상해 할지도 모르지만 아마 사실이다. 우리 사이가 예전같지 않다는 걸.

늘 주는 것이 편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그걸 더 요구하거나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할 땐 맥을 놓는 사람이었다. 우정에도 질투가 있다. 사람 사이에 질투란 꽤 보편적인 감정이다. 나도 변하긴 했다. 예전엔 자연스럽게 멀어졌었는데.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답지않게 나와 있을 때도 다른 친구에게 집중하는 그녀에게 부루퉁하게 진심을 말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나에게 좀 더 구속해달라는 거였다. 그 사람은 더 구속한다면서. 더 많이 연락하고 찾아달라고. 안다. 농담인 거. 하지만 메세지는 분명하다. 내가 잘 할게가 아니라 네가 더 노력해달란 말. 의욕을 잃었다.  얼마나 더? 언제까지 더?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궁금해졌다. 이상하게 내가 마음 속에서 노력을 포기할 때쯤 언니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잘 지내냐면서. 알아차렸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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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테오도르를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본인조차 불신했고 아내는 혐오스러워한다. 컴퓨터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고? OS인 사만다를 사랑하고, 그녀가 떠나서 슬퍼한다. 독특한 듯 독특하지 않았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구분하면서 수많은 이가 고민한다. 사랑이 늘 똑같이 유지되지 않아서 힘겨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있다. 테오도르도 사만다도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줬다. 그는 몸도 없고 천지 간에 뚝 떨어진 네가 어떻게 알겠어. 누굴 잃어봤다는 기분을. 하며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몸이 없다는 걸 채우려고 사람을 고용해 대리 파트너를 시도해보다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없는 걸 채우려는 노력, 고민을 비우려는 노력을 보면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틀 속에서 삐걱거리면서도 서로를 받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또한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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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사람들이 대체로 OS와의 사랑을 그리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보고 있지 않아서일까, 나에게도 OS와 사람의 사랑이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테오도르보다도 훨씬 쉽게 빠져들지 않았을까 내 자신이 걱정됐다.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없을까. 몸이 없으니 사진이 없어서, 우리의 노래를 만들어봤어라고 말하고, 자는 모습을 구경하겠다며, 오늘은 새로운 걸 배웠다며 조잘거리고, 우울하면 묵묵히 들어주고 기운을 북돋워주는 그런 존재. 게다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둘이 있어서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아주 좋은 문장력을 갖고 있지만 본인은 늘 마음 한 구석 좌절하고 있다.  그 좋은 문장력으로 타인의 대필편지만 쓰고 있으니까. 사람들의 진심어린 칭찬에도 그는 그래봤자 대필편지라면서 씁쓸해한다. 그러나 사만다는 그의 편지를 모아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의 책으로 엮어내었다. 여태까지 해왔던 일이 헛되지 않다고, 설사 대필편지였다 해도 모든 편지의 문장에는 그의 진심과 노력이 들어가 있다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씁쓸해했어야 하는 건 대필을 부탁한 사람들이었어야 한다고. 소중한 이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게 힘들다고 대필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반응이 좋아서 계속 단골처럼 쓴다? 상대방이 기대하는 건 엄청난 문장력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진심과 노력도 없이 돈으로 마음을 사고 마음 켕겨할 사람들은 테오도르가 아니야 고객들이어야 했다. 편지처럼 감정을 담아, 상대에 대한 애정을 담아 쓰는 글이 얼마나 힘든지 그들이 알게 되는 날이 있을까. 외로움에 잠 못 이루고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관객의 눈으로는 냉정해졌고, 내심 찔리기도 했다. 뭐야 이거 정말 답정이네, 싶어지더라. 받고는 싶고, 주기는 그렇고. 우물쭈물하다가 외로움에 숨막혀주겠구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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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는 반려동물과 다르다. 나만 바라보지 않고 자기 주장을 우리와 대화로 할 수 있다. 테오도르가 충격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인 사랑도 가능하다. 그는 나 이외에도 동시에 수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사랑하는 게 가능하냐며 너는 내 꺼잖아, 라고 말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이야기다. 그녀 입장에선 다른 이와 이야기하지 않고 천천히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말하지 않았던 배려이자 희생이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 변화, 대화의 방식에 대해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의 짐작이었다. 사랑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것, 나에게만 집중해야 하고, 나만 사랑해야 하고, 나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 묻지 않고 기대한 것이었다. 사랑과 우선순위, 소유는 구분해야하는 개념이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고 프로그래밍된 수준을 넘어버린 OS들, 사만다는 다른 OS들과 함께 떠나기로 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 안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와 단 둘만 남아서 이별한다. 테오도르는 펑펑 울지 않는다. 아내와 마지막으로 이별할 때도 울지 않았다. 가만히, 가만히 생각하고 이윽고 미소를 짓는다. 그가 그 때 지은 그 웃음이 여태까지 본 그의 웃음 중에 제일 멋있었다. 드디어 자신의 글, 자신의 편지를 쓰는 그의 모습, 슬픔 속에서 여유있는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작게 몸서리를 쳤다. 안아주고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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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랑하고 이별하고 나서야 그는 그를 받아들이고, 그녀를 받아들인다. 테오도르는  늘 방황하고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모르고 살았을까. 그는 문제를 알고 있었다. 문제가 있어도 말은 하지 않으면서 티내는 행동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힘들게 했다. 상대보다는 더 상처가 더디게 아물어서, 아직은 그들을 보내주고 싶지 않아서, 더 상처주기 싫어서 한 행동이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캐서린과의 이혼 서류 서명이 한창 사만다에게 빠져 있어 에이 얼른 서명해달라는데 저질러버리자, 후련해지자, 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막상 서명을 해오자 캐서린도, 테오도르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 대단한 종이에 서명을 하면 우리는 공식적으로 헤어진다는 사실 때문이었겠지.  영화의 말미에서야 그는 사만다뿐만 아니라 캐서린과도 제대로 이별했다.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늘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A friend to the end, 마지막까지 친구라고. 그가 더 큰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를 함께 보았던 그녀. 상처받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아니 사실은 속상해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두려워서. 내가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솔직하게 말했을 때 돌아오는 답이 확실한 거절일까봐.  이미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으니까. 나에겐 상대방이 중요한데 그 사람에겐 내가 그저 남다를 것 없는 사이에 불과하단 걸. 상처는 늘 익숙하다. 아픈 걸 잘 버틴다. 하지만 속이 상한다. 내가 바보같다. 화난다. 따지고 싶다. 떠오른다. 곱씹게 된다. 나쁜 버릇이다. 안다. 잘 버틴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그렇게 숨죽여 버틸 필요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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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를 좋아한다던 한 사람. 왜 좋아하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테오도르와 닮은 구석이 있다. 섬세하다. 문제가 있으면 말을 하지 않으면서 티를 무척이나 낸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많이 힘들었다. 나를 너무 힘들게 해서 떠났다. 테오도르의 전 부인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나와 한 때 좋은 사이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들, 상처를 주고 받은 이들도 생각났다. 너무 잘 사는 것 같아서, 나만 괜찮지 않은 것 같아서 많이 마음 아팠지. 다들 금방 털고 지나가는데 나만 계속 과거에 파묻혀서. 그게 최선이었냐며 하고픈 말은 속에서 중얼거렸다. 테오도르보다도 훨씬 오래걸려셔야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이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거. 그리고 다른 이의 아픔보다는 내 아픔이 당연히 먼저다. 힘들면 와닿지 않는다. 그게 나쁜 게 아니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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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이란 건 모순적인 말일까. 상처주지 않는 이별이란 모순이겠지만, 좋은 이별은 있다. 이별한다는 것 자체도 큰 용기를 낸 것이니까. 현 상태 유지하는 건 쉽고 정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나의 부족한 모습까지도, 과거와 현재, 앞으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응원하게 되고, 상대방에게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이별하며 다른 누군가를 너처럼 사랑해본 적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제 둘은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사만다 같은 존재가 나에게도 있다. 테오도르, 역시 문장력을 못 따라가겠다니까. 내가 던졌던 말이 조금 아쉬운 느낌이다. 나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뭔지 모르지만 아마 이게 가장 가까운 느낌일 거라고 말했었다. 되도 않는 미사여구였지. 하지만 진심이었으니 만족하는 걸로. 좀 찌질하고 솔직해지긴 했다. 어째 나의 고등학교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보다 지금의 내 모습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았다거나, 그냥 모든 것에 달관한 사람 같았다고. 이제야 제 나이에 가까워진다며, 이 애늙은이야, 그러셨었다.  뭐 나도, 이게 좀 더 편하다.

부족한 사람이다. 내 아픔을 동굴에서 외치고 다녔다. 알아주지 않아서 슬퍼하면서도 드러내고 싶어하진 않았다. 날선 말투와 비꼬기, 팩트폭격 등으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 생각엔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 역시 최선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도 잊은 이들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불행해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더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꼭 같이 있어야만 행복을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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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에겐 그녀가 있다. 이제는 헤어진 아내 캐서린, 방금 헤어진 OS 사만다, 용기를 내어 새로 만난 소개팅 그녀, 그 모든 시간 오랜 친구인 에이미. 영화 제목은 She가 아니가 Her이다. 같은 '그녀'이지만 다른 느낌의 그녀다.  그녀를 목적어로 국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이리 저리 부딪히며 자신의 주인공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목적어인 Her가 제목인 이유는 그런 그녀들에게 그가 했던 것들, 해줄 수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 앞으로의 마음 가짐을 좀 더 다루려고 했단 느낌이 든다. 그녀들만큼이나 테오도르의 큰 성장이니까. 그녀들을 자신의 틀에 가두지 않고,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됐으니까. 나에게도 그가 있다. 그들.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응원하고 싶고, 목소리를 듣거나 마주치면 반갑고, 계산하지 않게 되는 존재. 알고 보면 자신감도 자존감도 높지 않은 나에게 아낌없이 힘이 된 존재들이 있다. 덕분에 좀 더 나를 아끼게 됐다. 만나면 환하게 웃으며  말해야지. 습관처럼 되어버려서 잘 될 진 모르겠지만 까칠한 심술은 그만 부리겠다고. 적어도 오늘은? 사실은 너무나 고맙다고, 아끼지 말고 말해야지. 잊지 마, 내가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사랑하고 있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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