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른을 위한 공연 - 정크, 클라운

“어른을 위한 공연, 웃음과 고요 속에서”
글 입력 2018.03.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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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K : 1. 폐물, 고물 ((고철·휴지 등)),
허섭스레기; 시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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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공연, 웃음과 고요 속에서”
 

 어렸을 때 미술학원에서 ‘상상화’를 그린 경험이 있다. 그때에 비하면 꽤 나이가 든 지금도 상상화라는 단어나 꽤나 낯설게 느껴지지만(그리고 이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당시의 어린 나에게도 상상화라는 단어는 꽤나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기억된다(이 상황은 좀 어색하다). 무엇보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말은 ‘나라는 실제 물건을 묘사하는 건 잘 하는데, 상상력이 조금 부족한 거 같아요’ 라는 미술학원 선생님의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현실적이라는 소리를 꽤나 많이 듣고 자랐고 허무맹랑한 걸 무지하게 싫어하는 아이였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말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그린 상상화는 그만큼 ‘전형적인 상상화’였다. 많은 아이들이 그리는, 자동차에 날개가 달리고 구름에 무지개가 걸린 일종의 공식 같은 상상화. 이처럼 그 당시에도,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상상화라는 단어는 나에게 구체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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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나에게 상상화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해준 한 공연이 있다. 며칠 전에 보았던 “정크, 클라운”이다. ‘어른’들을 위한 공연이라는 테마가 자주 등장하기에 내심 기대를 품었던 이 공연을 통해 나는 미술 선생님이 말하던 상상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딱히 정해진 형식은 없다. 자동차를 몰다가 인어가 되고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듣고 응급상황에 재세동기를 들었다가 다시 자동차를 몬다. 마음 가는 대로, 아무런 제약 없이 뛰노는 광대들을 보면서, 마치 꿈 속에 있는 듯 자유로운 그 흐름을 보면서, 이런 느낌이 선생님이 말하던 ‘어린아이다운 상상화’란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상상화란 단어를 정의한다는 말은 이상하다. 자유로움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 자체가 이 단어를 의미일 것이다. 그렇기에 상상화란 언어의 형태로는 정의할 수 없다. 결국, 형식의 부재가 가장 자연스러울 때에만 가장 상상화다운 상상화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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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극은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상상화에 대한 표면적인 질감을 알려주었으며, 그 질감을 몸소 느낄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무대 바로 앞에서 보았던 배우들의 표현력은 압도적이었다. 바로 코 앞에서 그들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과 표정의 미세한 변화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공연 내내 혼자서 ‘이건 진짜 연극 같다’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 연극을 보면서 연극 같다는 말을 내뱉는 일은 웃겼지만, 그만큼 배우들은 아주 생생한 공연을 펼쳐주었다.
 
 프리뷰에 썼던 말처럼 정말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공연 내내 끊이지 않았다. 반면 어른들의 웃음소리는 명백히 배우들이 놀이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만 들렸다. 공연 초반, 가끔씩 배우들이 놀이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 있었는데, 이 부분에선 아이들보단 어른들의 웃음 소리가 확실히 더 컸던 듯하다.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현실과 맞닿은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어른들은 놀이보다는 현실을 마주할 때 웃음짓곤 했다. 나 역시 이 순간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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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그저 아무런 계산없이, 1차원적인 슬랩스틱에 웃는 순간이 많아졌다. 같이 들리는 다른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맞추어, 나 역시 정말 실없이 그냥 웃었다. 공연의 목적이 현실에 찌든 어른들을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트리는 거라면, 그들의 생생한 마임으로 어른들을 아무 생각없이 웃게 만드는 거라면, 이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어른들이 극이 끝날 때까지 크게 크게 웃어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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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원적인 우스꽝스러운 마임도 이 공연의 큰 특징이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단연 엔딩 장면이다. 부산스럽게 장난을 치던 광대들이 다같이 조용히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잠기는 모습은 깊은 여운을 주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ASMR 음악을 들으며 잠자리에 들 듯, 그저 고요히 앉아 빗소리를 듣는 광대들의 모습은 활기찬 어린아이의 모습이라기보단 현실 속 어른의 모습이었다. 더 정확히는 현실의 어른이 미약하게나마 보일 수 있는 아이 같은 면모였다. 아이들은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발산한다. 자신의 욕구대로 즐겁게 놀이를 추구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유보다는 책임감에 억눌릴 때가 많다. 수많은 사회의 규율에 닳아가다 보면, 결국 ‘나’를 온전히 발산할 시간과 체력은 남아있지 않다.
 
 그런 어른들이 ‘자신’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자신이 괜찮은지 조용히 들여다보는 일뿐이다. 정신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서 그나마 온전히 자신을 되돌아보는 순간, 그 순간은 아마 잠을 자기 직전 고요히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그나마도 야근과 빡빡한 스케줄에 치여 지쳐 쓰러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 ‘어른’이란 이들이 스스로를 온전히 찾을 수 있는 시간은 그런 고요한 사색의 시간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엔딩 장면은 어린 아이 같던 광대들이 현실을 마주한 후, 나름대로 어른의 방식으로 앞으로 다가올 현실을 대비하는 모습이자, 동시에 본디 어른이었던 광대들이 어린아이처럼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다시 마주한 현실 앞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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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엔딩 장면 덕분에 공연은 단순히 어린 아이의 장난스러움뿐 아니라, 어른의 차분함까지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공연은 더더욱 어른을 위한 공연일 테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듯하면서도 실상 어른을 위로하는 콘텐츠들이 많다. 이런 콘텐츠들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이유도, 또 지속적으로 소비되는 이유도 결국은 팍팍한 현실의 삶 속에서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찾고 싶은 어른들의 소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어른이나 각자 자기만의 ‘상상화’를 마음 속에 그리고 있고, 가끔씩 이 상상화를 꺼내보며 현실을 버티고 있지는 않을까. 어른들이 그들의 순수함을 꺼내 보일 기회가 더욱 많아져서 ‘나’를 발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되길 바라본다.


고물, 쓰레기,
아무 생각없이 흘려보내는 무쓸모한 시간,
생각없는 놀이... 

그런 쓸데 없는 것들이,
우리들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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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려놓고 놀자!" _ 정크, 클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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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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