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길고양이의 몸에도 살아온 사회의 시간이 새겨진다 [도서]

마치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글 입력 2018.03.2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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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우아한 이론을 가져와도
혐오는 혐오이고, 
어떤 낙인을 갖다 붙여도
사랑은 사랑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혐오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분명 그럴 거라고 저는 믿어요.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김승섭 교수는 차별과 사회적 고립과 고용불안이 인간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고민하면서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는 소방공무원, 세월호 생존 학생, 성소수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만나고 그들을 연구하며 남긴 기록을 통해 사회가 인간 몸에 남긴 병과 상처를 되짚는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미세먼지가, 중금속이, 알코올이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듯 사회적 차별과 폭력 역시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성결혼이 금지된 지역에 사는 동성애자들은 동성결혼이 금지되지 않은 주에 사는 동성애자들보다 불안장애, 정동장애를 겪을 확률이 몇 배나 높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병리적인 변화는 항상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나타나고 진행됩니다.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일은 여러모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사회적 차별은 다른 질병의 원인에 비해 측정하기 까다롭고 어려울 뿐 아니라, 그렇게 밝혀낸 결과가 실제로 병을 유발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 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적합한 언어를 사용해 피해자가 겪은 일들을 알리고 관심과 변화를 촉구하는 것 역시 매우 예민한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고 정치, 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조건이기에, 그리고 모든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이 있기에 작가는 연구하고, 글을 쓰고, 가르치며 싸워 나간다.
 

"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작가는 쉽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 편하게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들려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내용은 그다지 편안하지 않다. 이 사회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사람들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몸에 사회의 시간이 새겨진다면, 비인간 동물들의 삶은 어떨까. 소외된 존재들의 아픔에 경중을 메길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이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가운데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한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비-인간 동물'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인간-동물'들이 늘 염두에 두고 신경 쓰는 바도 이 지점이다. 비인간 동물권 운동은 그 특성상 절대로 당사자성을 가질 수 없으며 매우 인간 중심의 이 사회 안에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선 인간이 그들의 권리를 대변해야만 하기에 더더욱 조심스럽고 민감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 더 많이 아프고, 불안정한 고용환경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몸이 더 많이 아프다면, 철저히 인간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의 편의에 따라 '유해동물'로 지정되기도 '익충'으로 지정되기도 하는 비인간 동물들의 몸은 어떨까. 그들도 더 많이 아프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생물학자도, 생태학자도, 도시환경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늘 동물을 좋아하고 가까이했지만 막상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는 동물에 대해 얘기하려니 여간 막막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단, 내가 일상 속에서 본 적이 있는 동물들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한 대형 아파트 단지에서 봤던 것들을 생각해본다. 고양이, 개, 쥐, 참새, 비둘기, 백로(아파트 단지를 통과해 흐르는 성내천엔 매년 백로가 찾아온다!), 까치, 까마귀, 그 외 여러 작은 새들, 개미, 바퀴벌레, 매미, 모기, 노린재, 잠자리... 이렇게 나열하고 나니 이름조차 모르는 새와 곤충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집 앞 공원에서 볼 수 있는 토끼와 청설모 등과 성내천에 서식하는 물고기들을 합하면 벌써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만 해도 20여 종이 넘는다. 내 생활 반경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의 종류는 실제로는 그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고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듯, 대형 아파트 단지(뿐만 아니라 도시 대부분의 공간)는 너무나도 인간 동물만을 위한 거주지역이다. 그 안에서 대다수의 곤충은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비둘기는 더러운 새로, 고양이는 쓰레기봉투를 찢고 발정 시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는 동물로서 존재하며 인간을 위한 거주공간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할 침입자로 여겨진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이외의 다른 젠더 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이 사회의 철저한 기득권자로 살며 간성, 바이섹슈얼, 에이 젠더, 트라이 젠더, 젠더 플루이드, 그리고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정체성이 존재함을 몰랐던 이유는 그것을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충격받고 슬퍼했다. 내가 그 비인간 동물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슬퍼진다.

  그래서 일단은, 그나마 내가 잘 아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고양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으로 시작하려 한다. 내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은 건 지난 1월 즈음이었다. 작년 늦여름부터 한 학기 동안 암스테르담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물면서 유럽 이곳저곳을 여행할 기회가 많았다. 책을 읽기 전부터 종종 들었던 생각이 있다.

'유럽 고양이들은 왜 이렇게 다들 깨끗하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지?'


그냥이.jpg▲ 아테네에서 만난 고양이
 

  처음에는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본 몇몇 고양이들의 특징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여기저기 많이 다녀볼수록, 학기가 끝나고 한 달 반 넘게 본격적으로 동유럽 국가들과 그리스를 여행할수록 점점 더 의문이 들었다. 모든 관광지에서 고양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아이들은 대체로 굉장히 깨끗했으며 사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러 이유 때문에 숙소를 주로 관광지에서 떨어진 주거지역에 잡았는데 그곳의 고양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만 느낀 점인가 했는데 함께 교환학생 생활을 했던 친구도 같은 얘기를 했고, SNS에 올라온 여행기를 보다 보면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나는 길에서 고양이를 발견하면 일단 심장이 내려앉고 홀린 듯이 다가가서 말을 걸고 손을 내밀어 보는 (무작정 만지려 하면 놀라고 싫어한다) 병이 있다. 유럽에서 만난 고양이들은 대부분 한가롭게 앉아서 졸다가 내가 다가가면 관심을 보였고, 귀 뒤를 긁어주면 눈을 지그시 감거나 심지어 내 손을 핥아주기도 했다. 더 만져달라고 졸졸 따라오기도 했다.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도 '싫지만 귀찮으니 한번 만지게 해준다'는 듯한 표정을 짓거나, 정 싫으면 내가 다가갈 때 슬그머니 몇 미터 옆으로 피했다. 질겁하고 도망간다는 느낌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반면 우리 아파트의 길고양이들은 단 한 번도 곁을 내준 적이 없다. 살짝 다가가 보려고 쳐다보면 화들짝 놀라며 몹시 경계했고, 망설이다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가면 재빨리 차 아래나 담장 너머로 숨어 낯선 인간을 주시한다.

  한 번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고양이들 밥을 주시는 캣맘을 만나 아이들이랑 친하시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그분은 이 곳에서 몇 년째 밥을 주시는데, 곁에 다가가도 도망치지는 않고 어떤 아이들은 만져주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지나가거나 좀 큰 소리가 나면 얼른 숨어버린다고 하셨다. 그런데 오히려 그 편이 낫다고, 괜히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어서 아무에게나 다가갔다 험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아 고양이 밥을 챙겨주면서도 일부러 거리를 두시는 분들도 많다고 말씀하셨다. 애초에 지저분하고 무섭게 생긴 고양이가 다가오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기도 해서 서로 그 편이 낫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아파트 단지 내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꼬질꼬질하고, 눈 한쪽이 없는 경우도 빈번하고, 귀가 잘려있거나(TNR표식이 아니라 사고나 영역다툼으로 잘린 경우) 상처가 가득하고 어딘가 병든 듯한 느낌을 풍긴다. 유럽에서 내가 만난 고양이들은 씻겨주고 돌봐주는 사람도 딱히 없을 텐데 반들반들하고 깨끗했다. 얘네들은 되게 집고양이 같네,라고 무심코 생각했다가 문득 다시 생각해보니, 고양이는 원래 집에 있든 길에 있든 웬만해선 깨끗해야 할 동물이다. 강아지들과는 또 달라서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몸을 단장하는데 쓰는데, 정말 깨끗하고 어지간해선 냄새도 안 나서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목욕시키는 경우가 많다. 데려온 지 5년이 됐는데 한 번도 씻겨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봤다.


메냥이.jpg▲ 메테오라 돌산에 있던 아이. 좀 만져주다가 한번 대담하게 쓰다듬었더니 저만큼 도망갔다.
 
두냥이.jpg▲ 두브로브니크 성벽 입구, 매일같이 앉아 있던 고양이들
 

  그런 동물들이 하나같이 때가 끼고 털에는 뭔가가 눌어붙어 있다는 건, 이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것이 몸을 단장하는 본능조차 잊게 할 만큼 고단하거나 아무리 닦아내도 더러움에 찌들어버릴 수밖에 없는 곳이 그들이 몸을 숨기고 쉬는 장소라는 의미다. 두브로브니크 성벽 입구는 사진엔 나오지 않았지만 열 대가 넘는 버스가 왕복하는 터미널이고 관광지 입구라 부산스러우며 매연도 많다. 흙에서 구르며 사는 고양이들도 흙먼지라곤 없었다. 모로코에서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던 아이들도, 비록 그래서 만져주진 못했지만, 몸은 깨끗했고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았다.(모로코는 정말 고양이 천국이다. 야시장의 노천 식당에 앉아있으면 옆에 와서 음식을 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고양이는 웬만한 환경에서도 청결을 유지하는 동물이다. 그런 고양이가 더럽다면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고양이는 뱃가죽이 늘어져 바닥에 끌릴 정도로 살이 쪘는데 이는 많이 먹어 정말 비만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다 남긴 염분이 많은 음식을 먹어 몸이 부은 것이다.

  몸의 상처도 그렇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일정 범위 안에 개체수가 너무 많으면 필연적으로 영역싸움을 한다. 아마 내가 본 아파트 단지의 고양이들의 상처도 대부분은 영역싸움으로 인해 생겼을 것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총 122개 동의 대단지이고 인근은 공원이거나 그린벨트 지역이다. 단지 내부도 동간격이 넓고 조경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최근 몇 년간 캣맘과 캣대디들이 TNR 사업을 진행해서 개체수가 조절된 지도 꽤 됐다. 그 안에 사는 몇몇 고양이들이 그렇게까지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건, 122개 동의 대단지가 고양이가 살기에도 넓고 쾌적한 환경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은 누구의 눈도 닿지 않는 곳까지 몰리고 몰려서 얼마 되지도 않는 먹이를 두고, 잠자리를 놓고 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비인간 동물들을 눈 밖까지 내몬 것은 고의든 아니든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

  짧은 기간 동안 네덜란드에 살고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며 느낀 점은 우리나라에 비해 그곳이 매우 동물 친화적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꼭 특정한 공원이나 산책로를 찾지 않고도 개를 산책시켰고, 그러나 마트에 들러 장을 볼 때면 건물 앞마당에 목줄을 묶어놓고 들어갔다. 그것이 당연한 일상의 일부인 듯 불안해하지 않고 착하게 기다리는 개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가끔 카페에 개를 데리고 들어오기도 했는데, 나는 워낙 동물을 좋아해 불쾌하지 않았지만 '저래도 아무도 불만을 얘기하지 않나?'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일로 시비가 붙은 것을 본 적은 없다.

  집안에서 동물을 키운 역사가 한국보다 오래되었고 동물 인권에 대한 논의도 더 이전부터 있어온 만큼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시민의식이 높아 갈등이 덜 생기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사회는, 인간 아닌 동물에 대한 사회적인 포용력이 높은 것으로 보였고, 집안 동물들에 대한 관심과 포용은 길 위 동물들에게도 이어져 우리 사회보다 좀 더 공생에 가까운 도시의 삶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존재도 시대상황에 따라 조금도 '견딜 수 없는'민폐가 되기도, 그냥 원래 그런 존재로 그렇게 같이 살아가기도 하듯 말이다. '맘충'같은 혐오표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정말 인성이 의심되는 정도의 민폐를 끼치는 엄마들을 지칭하는(그렇다 해도 이와 같은 혐오적 프레이밍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듯했는데, 그 민폐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져 공공장소에서 떼쓰고 우는 아기를 달래지 않는(달래지 못하는? 어느 쪽인지 어떻게 판단하는가) 엄마, 유모차로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는 엄마 등 엄마 아닌 다수자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엄마들은 모두 잠재적 맘충이 되었다. 사실 아기란 원래 떼도 쓰고 울기도 하고 가끔은 통제가 안 되기도 하는 존재인데, 육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경우엔 문제가 되지 않던 특성도 여성, 그중에서도 엄마에 대한 공격적인 담론이 형성되고 나면 절대 못 참아줄 특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수자든 인간을 넘어선 비인간 동물이든 같은 공간에 살아가는 모두를 포용하는 사회가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본다. 사실 다수자의 입장에서 봐도, 그렇게 미워하고 배제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참 피곤하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이다.


포냥이.jpg▲ 포르투의 한 골목. 사람들 다니는 골목에 밥을 줘도 갈등이 생기지 않는가보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관점의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고민이지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인간 중심의 도시공간에서 인간보다 약한 비인간 동물은 더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프다. 마치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듯, 길고양이의 몸에도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진다.

*

  '"길냥이를 부탁해", 포스트휴먼 공동체의 생정치'에서 전의령(2017)은 길고양이가 유기동물이 아닌 길고양이, 즉 길에서 주인 없이 살아가는 존재 그 자체로서 공존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을 새로운 사회성(sociality)과 관계망 속에서 재인식하는 작업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즉 길고양이가 서식하는 도시라는 공간이 인간 중심의 정의에서 벗어나 새롭게 재정의되어야 하고, 그 속에서 인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지만 인간에 의해 소유되지는 않는 존재의 가능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인간에 대해 얘기한 책을 읽고 그 담론을 동물의 영역으로 확대해 고민해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가장 잘 알고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동물 종을 중심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고양이에 대한 인식은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개선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부정적 의미의 '도둑고양이'대신 '길고양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2000년대부터 제기되었고 2009년부터는 정식 용어로 채택되어 이제는 '길고양이'가 일상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가구도 최근 몇 년 새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제 더 많은 동물종과의 공생도 함께 도모하기 시작할 때다.

  '어떤 종을 보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인간이 떠올리는 답은 굉장히 인간 중심적이다. 인간에게 병을 옮기거나, 더럽거나, 미관을 해치거나, 작물을 먹어치우는 동물은 유해동물이다. 반면 귀엽고 무해하게 느껴지는 동물은 너무나 손쉽게 보호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판다가 귀엽게 생기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멸종되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다 뼈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귀엽다'는 기준은 굉장히 주관적이고 또 문화적이어서 인간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사납고 음침하고 더럽고 예민한'동물이었던 고양이가 '도도하면서 허당 같은 매력을 동시에 지닌 귀여운'동물로 변모하는 과정도 너무나 빠르게 일어난다.

  1992년 11월 10일 자 경향신문에 "신촌골 다람쥐를 살리자"는 제목의 짧은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그 내용은, 최근 '도둑고양이'가 늘어 다람쥐들을 위협하면서 신촌골의 정취를 더해주던 다람쥐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세태를 연세대학교 학생들과 교직원이 안타까워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양이 박멸작전'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양이를 잡기 위해 공기총을 사용하고 특수 제작한 덫을 놓을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25년 전만 해도 이 동물은 캠퍼스의 정취를 위해  '박멸'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내가 2014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은 캠퍼스 내의 '다람쥐 길'이라고 불리는 오솔길을 소개해주며 예전에는 다람쥐가 많았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요즘은 고양이가 다녀서 다람쥐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고양이들'이던 그 동물들은, 2015년 '고려대 고양이 쉼터'라는 단체가 만들어져 학생들로부터 적극적으로 고양이 이름을 공모하고 그들의 건강을 살피고 위험한 아이들을 구조하면서 다람쥐 길의 마스코트로 자리 잡았다.


시루.jpg▲ 학생들이 고려대 고양이 쉼터 페이스북 페이지에 제보한 '시루' 사진
 

  아파트 단지에 사는 고양이들보다, 학생들이 신경 써서 돌보는 교내와 학교 주변 주택가 고양이들은 좀 더 건강하게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랬으면 좋겠다.

*

  이제 다른 비인간 동물종에도 관심을 돌릴 때이다. 유럽에서 또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둘기가 위로 날아가거나 다가오면 질색을 하고 공원에서 먹이를 주는 일도 점점 금지하고 추세인데, 여전히 유럽의 길거리와 공원에서는 먹던 빵과 과자를 뿌려주는 것이 자연스럽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비둘기들을 손에 앉혀 먹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비둘기가 몸에 세균과 벼룩이 많고 더럽다는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변기보다 더럽고 세균이 득실득실한 동물이나 사물이 한가득일 텐데 그중 유독 한 종만 사회적으로 '극혐'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는 한번 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인간 중심의 공간의 지배자인 인간 종이 함께 가지는 특정 종에 대한 혐오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둘기가 유해한 새이고 개체수가 너무 많아 골치가 아프다는 이유로 독을 탄 모이를 뿌려준 사례는 그 자체로 경악스러웠다. 꽤 옛날에, 새 박사로 유명했던 윤무부 박사가 어느 방송에선가 했던 말이 있다.

"비둘기가 도시에 너무 많은데, 잡아 죽여서 수를 줄이겠다는 건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무서운 발상 아니냐. 종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다. 어느 동물이든 쉴 곳을 필요로 한다. 난간에 새들이 앉아 있어 고민이라면, 비둘기가 많이 모여 앉는 지붕이나 난간을 비스듬하게 설치해 앉을 수 없도록 하면 된다. 쉴 곳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다."

  오래전 어렸을 때 들은 얘기라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저런 이야기였다. 저게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 대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말이 마음에 남은 건, 비록 어떤 비인간 동물이 우리와 도저히 공생을 꾀할 수 없는 종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죽여 몰아내는 것이 그토록 당연해선 안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비둘기가 가진 수많은 질병과 비위생도 근본적으로 인간 사회가 새긴 것이 아닌가.

  혐오와 차별과 사회적 상처는 몸을 병들게 한다. 소외된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동물의 병든 몸은 다시 한번 배제당한다. '미관을 해치기'때문에. 작가는 사회적 원인을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외된 존재들의 아픔에 대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에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


[이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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