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1차원적 웃음의 뼈아픈 상대성 [공연]

글 입력 2018.03.1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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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6일 대학로는 어느 때와 같이 붐볐다. 대학예술극장 대극장 건물에는 정크, 클라운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여져 있어 쉽게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연극을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어쩌면 영화보다 더 고차원의 영역이 연극일 것이다. 정말 연극이야말로 순수예술이기 때문이다. 연극의 순수예술성을 논하기 전, 먼저 정크, 클라운의 본격적인 리뷰를 시작한다.

 정크, 클라운은 5세 이상 관람가의 공연이다. 사실, 이 점이 가장 신경 쓰였다. 극장에서 전체관람가를 볼 때마다 항상 아이들의 부산스러움과 한 씬, 한 씬 마다 첨가하는 코멘트들은 내가 전체관람가를 피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래도 “어른들은 이렇게 놀면 안 돼? 다 내려놓고 놀자!”라는 문구에 끌려 보게 되었다. 더불어,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구는 ‘사회 속에서 소모되고 있는 당신에게~’라는 문구였다. 프리뷰 기사에서도 말했다시피, 내가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은 무언가를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보다 덜 한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가 소모되고 있다니? 내가 자명종의 건전지처럼 닳고 있다니? 이처럼 끔찍한 소리도 없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내 존재의 소모됨을 인식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북적였다. 다시 한번 5세 이상 관람가라는 것이 코앞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표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특유의 연극 극장의 냄새는 아이들의 부산스러움을 잊게 하는 것에 충분했다. 운 좋게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게 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무대 위 소품들을 구경하였다. 모든 것이 리사이클링 형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박스, 바가지, 드럼통 등등. 수평으로 죽 늘어져 있는 무대 소품들을 가지고, 어떻게 신나게 놀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로비에서 봤던, 아이들이 줄지어 들어오더니 내 옆에 떡 하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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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이 어두워지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각자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듯한 행위가 펼쳐졌다. 그들은 분명 성인이었지만, 해진 옷들을 입고 표정은 아이들과 같이 헤벌쭉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들의 마임이 시작되었고, 여행이 시작되었다. 육, 해, 공을 넘나드는 그들의 마임은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낼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갖은 노력으로 빚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간 곳은 육, 육지이다. 바가지를 이용하여 오토바이를 만들고, 찌그러진 냄비를 이용해 자동차 핸들을 만들었고, 자전거의 부품을 이용해 자전거를 흉내 냈다.

 무대에는 그들의 몸짓과 표정 외의 다른 특수효과들은 없었다. 속도감을 표현할 수 있는 강풍기도 없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몸 하나로 속도감을 표현해냈다. 혼자 하는 마임은 자기만 잘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하는 마임은 절대 혼자만 한다고 되는 공연이 아니다. 서로의 합이 중요하며,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그들이 간 곳은 공, 하늘이었다. 드럼통 위로 올라가 비행기처럼 나는 시늉을 하고, 나머지 3명은 그 비행기를 공격하는 역할이었다. 음향 효과도 없고, 그들의 입으로 “피슝”, “휙” 하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냈다. 세 번째는 해였다. 바닷속에서 인어가 되고, 물고기가 되어 바다를 헤치며 그들은 신나게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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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그랬다. 우리도 저렇게 놀았다. 절대 연극이라 가능한 연출들이 아니었다.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이 그러하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환경과 일상들을 상상의 나래를 펼쳐 가능하게 만들었다. 콘크리트 땅을 푸른 바다로 만들 수 있었고, 여기저기 주차되어있는 차들을 없애고 공허한 하늘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들이 존재하고 지금의 나이로는 할 수 없는 눈치가 보이는 일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저 그 일상에 파묻혀 어쩔 수 없이 소모되며 살아가고 있다.

 가장 인상 깊던 장면은 단연 엔딩장면이다. 엔딩장면에서는 즐겁고 신나게 놀던 현장에 비가 오는 장면이다. 즐겁게 놀던 이들은 갑자기 오는 비에 황급히 우산을 찾는다. 물론, 찢어지고 낡아서 헤진 우산들이다. 각자 놀던 박스들을 치우고, 자신이 명명한 자동차들을 해체하는 과정이 우리의 일상과 매우 닮아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바람을 어쩔 수 없는 상황들에 굴복하며 저버리고 만다. 그리고 다들 낡은 우산들을 쓴 채 막이 내린다. 그렇게,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들은 그들의 놀이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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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엔딩이 아니었더라면, 많은 실망감을 가지고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어쩌면 이 공연에 맞는 관객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분명 이 공연은 “다 내려놓고 놀자”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마임의 의미를 해석하려 노력했고, 계속해서 의미부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나은, 완전하게 충실한 관객들이 많았다. 그들은 바로 어린이들, 주부들, 할머님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공연을 볼 줄 아는, 공연 관계자들이 원하는 관객들이었다. 그들은 1차원적 웃음에 함박웃음을 지었으며, 이것저것 마임을 추측하며 공연에 흠뻑 빠졌다. 아이들은 크게 소란 피우지 않았으며, 공연을 잘 보았다. 공연 초반에 했던 내 이기적인 생각들이 부끄러움으로 돌아오는 때였다.

 비가 오며 막이 내렸고, 내가 제대로 된 관객의 마음가짐이었나를 생각하며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공연의 주제와 마임이라는 예술의 형태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공연이었다. ‘삶의 원리가 연극의 원리’라는 화두를 가지고 ‘일상의 경험을 무대 위로 가져가고 무대 위의 깨달음을 일상으로 가져오는 순환’을 통해 삶의 원리를 터득하고 소통하고자 한다는 극단현장의 취지와 맞는 공연이었다. 그 순환을 이해하는 관객들이 많았고, 그들은 절대 그 순환을 비극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상대적으로 그 순환을 뼈아프게 느낀 것이다. 비가 내림과 동시에 극의 막이 내렸고, 내 마음에도 순환이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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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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