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여성, 이곳에도 도착 [전시]

신여성 도착하다 展
글 입력 2018.03.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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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해야 할 열여섯 무렵, 남녀공학인 A고등학교와 B여고 둘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고 있던 참에 B여고 선생님 한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A고등학교와 B여고는 대학 진학률에 있어 묘한 경쟁관계였기 때문에, 성적이 좋은 편이었던 나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이었다. 선생님을 만나 B여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시설이 좋네 특별 관리를 해주네 어떠네 하는 말에 속으로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던 찰나, 그 선생님의 한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녀공학 학교에서는 여자애들이 좋은 성적 받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고등학교에 올라갈수록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을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에 여자들끼리만 경쟁할 수 있는 여고가 유리하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A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선생님의 말씀이 정말 사실과 경험에 입각한 말인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선생님은 성별이라는 단 하나의 요인만을 가지고 나의 가능성을 멋대로 ‘한정’해버렸고, 나의 자신감을 위축시키고 불안감을 조성하려 했던 것이다. 고작 그 정도로 저를 설득하려 하시다니, 사람 제대로 잘못 보셨네요.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선생님께 이렇게 속으로 외치며 지금껏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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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지난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는 말을 듣고, 내 나름대로 이 날을 어떻게 기념할까 해서 다음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를 보러 갔다.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신여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다양한 현상과 담론을 조명하는 전시였다. 전시 포스터에서부터 보이는 ‘모던걸’의 이미지가 덕수궁 미술관의 모던한 느낌과 아주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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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만평, <저것이 무엇인고>, 1920, '신여자 2호'


전시는 “‘신여성’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출발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전시 중 1부 “신여성 언파레-드*”는 1900년대 초 이 땅에서 신여성의 이미지가 어떻게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였고 또 구성하였는가를 다룬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는 나혜석의 판화작품은 조선에서 신여성에게 부여된 이중적인 시선을 상징적으로, 위트 있게 표현한 것이다.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에서의 신여성이라는 개념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단순히 남녀 간의 대립이나 여권 신장만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닌,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서 일제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혼합된 것이다.

*‘언파레-드’는 ‘온 퍼레이드(on parade)’의 1930년대식 표현으로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무대 위에 일렬로 늘어선 모습을 일컫는다.
(국립현대미술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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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정청(靜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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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태, 인물일대(人物一對): 탐구(探究), 1944


전시는 예술작품 속에 여성이 단독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그림과 사진 작품들을 통해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이유태의 <인물일대(人物一對): 탐구(探究)(1944)>나 김기창의 <정청(靜聽)(1934)>과 같은 회화작품을 통해 주관을 갖춘 여성의 등장을 보여준다. 반면 양주남의 <미몽>이라는 영상 작품은 신여성에게 강조되었던 현모양처라는 모순적 가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신여성은 서구식 교육을 받고 취미와 직업을 가진, 즉 ‘근대적 교양을 갖춘 주체적 여성’이며, 서구의 패션과 화장법을 선망하며 유행을 선도하는 모던걸의 이미지를 가진다. 동시에 이렇게 여성에게 높은 수준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현모양처’라는 유교적 가정에서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 모순이 생기면서 조선의 신여성들은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근대 여성 미술가들”에서는 좀 더 범위를 좁혀, 미술의 영역에서 직접 주체가 되어 활약한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다룬다. 주로 기생들이 그렸던 서예나 사군자부 작품을 시작으로, 미술학교 출신의 동양화가와 서양화가들의 회화 작품, 그리고 자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놀랐던 부분이 바로 자수 작품들인데, 지금까지도 자수가 예술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왔기 때문에 그동안 자수 작품을 미술관에서 볼 기회가 많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20세기 중반부터 동경 여자미술학교 출신들이 한국 미술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했지만, 그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자수 전공자들이 회화 중심의 근대미술 역사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전시관에서 자수 작품을 보면, ‘이것이 아트가 아니라면 뭔가’ 싶을 정도로 멋진 것들이 많았다. 남성의 언어로 쓰인 역사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배제되어온 것처럼, 회화와 조각이라는 미술의 주류에서 자수는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주류의 사회에서 누락되는 비주류의 것들을 계속해서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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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도착하다 展' 2부 전시관 전경(자수작품).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페이스북 페이지


3부에서는 나혜석(화가), 최승희(무용가), 이난영(음악가), 김명순(문학가), 주세죽(여성운동가) 등 5인의 신여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오마주 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눈길이 갔던 인물은 나혜석. 그녀의 판화 작품은 재치 있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며,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자화상(1928)>과 남편을 그린 <김우영 초상(1928)>이라는 유화 작품 또한 나혜석의 고집스러울 정도로 강단 있는 성격을 드러낸다. 전시 군데군데에서 볼 수 있는 그녀의 시나 어록 또한 정말 그 시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진보적이고 비범하다. 나혜석이라는 인물의 삶의 행적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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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층 전경. ⓒEmily Chae


페미니즘이라는 화두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각광받고 있는 시대다. 적절한 시기에, 한국 근대사에서 ‘여성’이 ‘주체적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는 지위를 어떻게 쟁취해왔나를 되짚어보는 중요한 전시라고 생각한다. 이 전시를 관람한 후 일차적인 반응은, “그간의 노력이 이렇게나 많았구나”였다. 학창 시절 진리처럼 들여다보았던 교과서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실려 있었던가? 역사 교과서의 참고란이나 부록 정도에 실리는 사회문화적 현상과 인물의 업적이라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성과 문화사가 역사 교과서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 사회 구조에 대해 재고해 보아야 한다.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이 중요한지는 지금까지 누가 정해왔는가? 그 ‘누가’가 타자를 바라보는 방식은 어떠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담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B여고 대신 A고등학교를 택한 것은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서 최초로 ‘나 자신’을 인식하게 된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고, 오히려 감정적으로나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나의 성별로 꿈의 크기를 제한하고, 발목을 붙잡고, 능력을 덮어버리지 않고 내가 나로서 온전히 설 수 있는 세상, 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그것이 나를 평가하는 지배적인 요소가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인 것 같다. 스스로 ‘신여성’이 된 순간인가.


“지식에 굶주린 우리는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자기 자신까지도
눈뜨고 보지 못하는 가련한 우리이다.

그러나 이 불행이
영원히 있을 것은 아니다.”

- 잡지 <근우> 창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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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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