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충분히 아파할 시간이 필요하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문학]

글 입력 2018.03.12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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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단 한번,
오색찬란한 사람을 만나지.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단다.

Flipped, 2010


오래전, 우연히 보고 인생 영화가 된 <플립>의 대사이다. 사랑을 모르는 어린 손자에게 전하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막연히 오색찬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 영화를 친구에게 추천해주다 이야기는 의식의 흐름을 타고 "색채"라는 주제로 흘러갔다. 친구는 지나가듯이 말했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색이 보인다?"
"오... 그래? 그것 참 괜찮다"

나 또한 흘러가듯 반응했다. 장난처럼 스쳐간 일이었지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책을 보고 문득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때 물어볼 걸 싶었다. 나는 어떤 색채를 가진 사람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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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키 쓰쿠루와 네 친구들


고등학교 시절, 다자키 쓰쿠루에게는 네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아카(빨강), 아오(파랑), 시로(하양), 구로(검정). 공교롭게도 친구들의 이름에는 모두 색이 들어갔다. 이들과 쓰쿠루는 꼭 다섯 손가락처럼 서로가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후, 일본어로 무언가를 '만든다'라는 의미의 이름답게 쓰쿠루는 역을 만드는 일을 배우러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다. 다른 친구들은 나고야에 있는 대학에 다니지만 이후에도 그들은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어느 날, 쓰쿠루는 자신이 퇴출되어야 하는 이유도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혼자가 되었다.  쓰쿠루는 오랜 시간 죽음의 문턱에서 방황하다 겨우 돌아온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그룹에서 필요 없는 존재이기에, 혼자만 색채가 없는 무난하고 보통적인 존재이기에 퇴출당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쓰쿠루는 여자친구 사라의 조언으로 그의 아픔을 돌아보는 순례길에 오른다. 그가 친구들 사이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가며 그는 꽁꽁 감춰두었던 아픔을 마주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모두 다자키 쓰쿠루다.


어린 아기들은 말을 하지 못하는 대신
울음을 통해 자신이 아픔을 알린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이들은 커가면서 아파도
눈물을 참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
우리는 눈물뿐 아니라
아픈 마음을 참는 법을 배운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쓰쿠루가 살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은 기억을, 상처를 저 가슴 깊숙이 묻어두는 것이었다. 사라를 만나기 전까지 다자키 쓰쿠루는 상처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그저 참아가며 외면하며 인생을 살아왔다. 사실, 다자키 쓰쿠루라는 이름만 다를 뿐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그저 상처를 꽁꽁 감춰두고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다자키 쓰쿠루들에게 작가는 사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묻는다.


"그때 입은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었고 나름대로 아픔을 극복해 왔어. 물론 긴 세월에 걸쳐서. 이제 겨우 딱지 앉은 상처를 지금 다시 열어젖히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만 어떨까. 그냥 표면적으로 아문 것처럼 보일 뿐인지도 모르잖아. 안쪽에서는 아직도 조용히 피가 흐르고 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우리는 아파할 필요가 있다 –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는 바꿀 수 없기에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순 없어."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몸의 상처도, 마음의 상처도 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처가 낫기 위해서는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 몸의 상처도, 마음의 상처도 외면하고 방치해두다간 더 심하게 덧만 난다. 이를 사라는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는 바꿀 수 없다"라고 표현한다. 가슴 아픈 기억을 꼭꼭 숨겨 외면할 수는 있지만 그 기억이 사람에게 남긴 영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아프더라도 상처를 제대로 마주할 필요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가 자신이 퇴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가며 아파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아픔도 마주하게 된다. 쓰쿠루의 이야기는 나 또한 마음 한편에 꽁꽁 묶어 놓았던 이야깃주머니에 작은 구멍을 낸다. 그리고 그 구멍은 점차 넓어져 덧난 아픔들이 와장창 흘러나온다. 책을 읽으며 당신도 오롯이 아파해볼 수 있기를. 그리고 아파한 만큼 다시 행복해질 수 있기를.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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