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등래퍼" 속 '고등학생' 아닌 래퍼, 그 간극에 대해 [문화전반]

글 입력 2018.03.08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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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겨울 인기를 끌었던 엠넷의 힙합 서바이벌 <고등래퍼>는 지난달 23일 두 번째 시즌을 시작했다. 첫 시즌의 인기를 증명하듯 올해는 지난 시즌 4배의 지원자가 몰렸고, 예선과 1차에서 많은 수를 걸러야 하는 만큼 각 단계 미션과 방송 구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시즌1은 지역 대표 선발전을 거쳐 올라온 지역 대표들이 출신 지역 내에서의 순위를 놓고 경쟁하는 무대로 막을 열었다. 서울 강서, 서울 강동, 경인 동부, 경인 서부, 광주 전라, 부산 경상 지역에서 각각 9명씩의 대표들이 선발되었고 이들은 순위 깨기 방식을 통해 다시 한번 본인 지역팀 내에서의 순위를 확정 지었다. 억압받던 흑인계층의 저항정신을 표출하는 장르로 시작된 장르에서 인종과 출신지역으로 정체화한 래퍼들을 낳았던 미국, 즉 본토의 특성을 생각하면 제작진이 지역별로 팀을 나눠 경합을 시키는 포맷을 설정한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올해는 달랐다. 엠넷은 시즌2의 첫 방송에서 8000명의 지원자 중 제작진이 선발한 32명의 참가자들이 학년별로 모여 어색한 만남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년에는 지역 대표들끼리 한 팀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학년 대표들을 선발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 안에서 팀을 새롭게 조직하는 방식으로 경연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교실처럼 꾸민 스튜디오로 한 명씩 들어온 참가자들은 먼저 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하며 팀원들을 파악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나중에 들어온 친구에게 장난을 치며 깨알 같은 재미를 뽑아내기도 했다. 거친 가사를 쓰고 자신의 분야에 무섭게 집중하는 모습이 여느 프로 래퍼들에 견주어도 밀리지 않아 보이지만, 그럴 때는 또 그 또래의 '학생'같아 보기 좋기도 하다.

  '고등'래퍼니만큼 참가자들은 프로그램 초반인 아직까지는 교복을 입고 출연한다. 서울한국예술고등학교, 한림예술고등학교 등 예고 재학생들이 눈에 띄는가 하면 외고에 합격해 (촬영 당시) 입학을 앞두고 있다는 예비 고1 참가자도 있다. 교복을 입은 학생 참가자들 틈에는 사복을 입고 등장한 몇 명도 있다. 윤병호, 배연서, 김하온, 이병재, 조원우는 현재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는 상태로 소속 학교가 없다. 이들은 교복 대신 본인이 직접 고르거나 크루 내의 스타일리스트가 코디해준 옷을 입고 학년별 싸이퍼를 치렀다. 프로그램명은 <고등래퍼>이지만 고등학생이 아닌 참가자가 있다는 말이다. 10대 래퍼들을 양성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지원자들을 모집해서인지 스튜디오도 교실과 같은 분위기에 프로그램 로고도 학교 문양을 연상시키는 데다가 시즌 1에는 지역 팀별로 교복 유니폼을 맞춰 입혔다. 그런 프로그램에 10대이지만 학생이 아닌 참가자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프로그램명과 달리 사실상 <고등래퍼> 지원자격과 고등학교 재학 여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엠넷에서는 프로그램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HOT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힙합, 특히 10대들에게 힙합은 대세 of 대세! 고등학생들만의 거침없고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힙합을 통해 담아내는 것은 물론, 10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건강한 힙합 문화를 전파할 고교 래퍼 서바이벌 <고등래퍼2>. 국내 최고의 힙합 아티스트들의 깊이 있는 멘토링을 통해 힙합 꿈나무가 고등래퍼로 탄생하는 성장 스토리가 지금 펼쳐진다. 2018년 2월 13일, 세상을 뒤집을 10대들의 힙합 전쟁! 대한민국 힙합씬이 주목하는 새로운 고등래퍼는 누가 될 것인가.


고등래퍼.jpg
 
  
  <고등래퍼2>의 지원자격은 1999년생(지원 당시 고3)부터 2002년생(예비 고1)까지로, 대한민국 정규 교육과정에서 명시하는 고등학생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프로그램은 '10대들의 힙합 전쟁'을 슬로건으로 내건다. 32명의 출연자 중 5명은 10대이지만 고등학생이 아니다. 누군가는 별생각 없이 지나칠 작은 혼란이다. 이 혼란의 이유는 간단하다. 프로그램 제작진이 '16~19세의 10대 청소년'과 '고등학생'을 동의어로 여겼거나, 최소한 그 둘이 지칭하는 집단이 다를 수 있음을 인지했다 하더라도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은 '고등'래퍼라는 프로그램 안에 '자퇴생'이라는 분류로 포섭이 가능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프로그램 소개에서도 '10대'와 '고등학생'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섞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10대라면 큰 고민 없이 고등학생이라고 일단 생각해두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 10대는 그 범주를 벗어난 경우라고 분류하는 것이 '10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건강한 힙합 문화를 전파'하겠다고 말하는 프로그램이 가져도 될 시선일까.

  학교 밖 청소년들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이유로 정규 교육과정 밖에서 살아가고 교육받는 것을 선택한다. 많은 학생들이 일반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나오게 되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원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받고 싶어서, 일반 학교에서는 지원이나 지지를 기대할 수 없는 분야를 배우고 싶어서, 대안적인 삶을 살고 싶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중 일반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를 선택한 경우만 하더라도 그 부적응의 유형과 원인은 수없이 다양하다. 원하는 삶이 있어 학교를 나온 경우에도 그 대안적인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그들이 그리는 상이 한 가지일 리는 없다. 그러니 100명의 학교 밖 청소년이 있다면 100가지의 학교를 나온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교적 명확하다. 2016년 여성가족부에서 시행한 학교 밖 청소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56.9%가 학교를 그만둔 것을 후회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는데, 그 이유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어서(52.3%), 졸업장을 받지 못해서(52.3%), 교복을 입지 못해서(51.9%), 친구 사귈 기회가 감소해서(44.6%), 학생 권리가 상실되어서(33.3%)로 나타났다(복수 응답 가능).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어서라는 응답은 자퇴가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대안이 되지 못하며 이들이 지속적으로 삶을 계획하고 살아나갈 수 있도록 지원과 교육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해야 함을 보여준다. 졸업장을 받지 못해서라는 응답은 좀 더 의미심장하다. 청소년이 학교를 나가서 특기를 살리든 대안교육을 받든 결국 그 '고등학교'라는 기관의 졸업증명서가 필요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고,  졸업장이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차별이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학생 권리가 상실된다는 것 역시 학생이라는 신분이 사라지는 순간 사회에서 제공하는 안전망이 사라지고 무방비로 노출되는데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응답일 것이다.

  경연에서도 참가자들은 학교 밖 청소년으로서 겪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지난주 소름 돋는 무대로 화제가 되었던 이병재는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에서 본인에게 우울감, 열등감, 불안감을 준 상황에 대해 말하고 그 인물들에게 묻는다.


이병재.jpg
 
 

엄마 아들은 자퇴생인데
옆방에 서울대 누나는
나를 보면 어떤 기분이신가요

동생이 못나 보이고 아들이 못나 보이고
어디서 얘기 꺼내기도 쪽팔리신가요

자퇴하지 않고 견딘 친구가
전교 몇 등을 했단 소릴 들은 엄만
어떤 기분이신가요

애매한 표정으로 제게 그 얘기를 했던
엄마는 그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난 행복한데도 말야 혼자 자주 울어

-이병재, 팀 대표 결정전


  물론 학교를 나와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삶을 노래하는 참가자도 있다. 자신의 직업이 traveler라고 소개하는 김하온은 진리를 찾고 있지만 아직 선뜻 답을 내릴 수는 없으며, 오히려 당신의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니 말해달라고 얘기한다.


 김하온.jpg
 

배우며 살아 비록 학교 뛰쳐나왔어도
깨어있기를 반복해도
머리 위로 흔들리는 pendulum
난 커다란 여정의 시작 앞에 서 있어. 
따라와 줘 원한다면, 나 외로운 건 싫어서

-김하온, 학년별 싸이퍼


  재작년쯤, 우연히 기회가 되어 서울의 한 대안학교에서 2회 정도 임시로 수업을 맡았던 일이 있다. 관심을 갖고 찾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대안학교는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관, 교육 방식에 따라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정규 교육과정에 가까운 흔히 말하는 학교 공부를 시키되 기존의 학교보다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성취에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는 데 중점을 두는 학교가 있을 수도 있고, 농사, 공예, 문학, 영화, 체육 등 자유롭게 한 학기 수업을 꾸려 나가는 학교도 있으며 아예 1년 간의 세계 일주가 수업 내용인 학교도 있다. 물론 학교폭력 등 학교에서 비행을 저질러 나오게 된 학생들을 모아 나름의 교육철학을 가지고 엄격하게 교육하는 기숙학교도 있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학교는 선생님들이 회의를 통해 굉장히 자유롭게 수업의 큰 그림을 그리고, 필요한 경우 그 수업을 맡아줄 선생님을 외부에서 구해 다시 한번 구체적인 한 학기 계획을 짜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각자 원하는 수업을 신청해 듣게 된다. 그곳의 학생들은 대부분 대안의 삶을 꿈꾸며 학교를 나온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이 말하는 학교 밖 청소년으로서 겪는 슬픔은 엄청나고 거창한 문제 상황보다 일상의 곳곳에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평일 오전에 사복을 입고 길을 돌아다닐 때 "학교 왜 안 가고 여깄냐"라고 묻던 할아버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니 혀를 끌끌 차던 아주머니, 버스에 타 학생 요금을 내자 "이 시간에 탔는데 학생 맞느냐"라고 묻던 마을버스 기사님, 학생 할인을 받으려면 학생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던 영화관 직원 등(다행히 이제는 학생증만이 아닌 청소년증으로도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학교 밖 청소년에게 상처를 입혔다.

  10대라면 당연히 학생일 것이다, 학생이 아니라면 문제아일 것이다, 혹은 철딱서니 없는 로망을 좇는 것이다. 그러니까 10대의 가장 이상적인 본모습은 학생, 학생이 아닌 10대는 특이하고 무언가 범주에서 벗어난 케이스. 학교 밖 청소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바로 그 낙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낙인에 대해 가장 저항적이어야 할 장르에서 다수의 논리를 그대로 재생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한국 힙합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또다시 드러난 것이다.

  올해 외고에 입학한다는 예비 고1의 한 참가자는 진행자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인데 고등래퍼에 나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스크린에 이름이 뜰 때 학교가 같이 뜨던데, 거기에 외고가 뜨면 간지 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사회가 정한 옳고 그름, 다수의 논리 다 x까!"라고 말할 것 같은 집단의 아이들조차 너무나 철저하게 공교육 위주의 학벌주의 사회의 논리를 내재화하고 있고, 그 안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그 길에서 벗어났음에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우스갯소리로 '슬럼가에서 총 들고 마약 하던 애들이 랩머니 벌어서 돈자랑하는 게 미국 힙합이면, 구몬 풀고 얌전히 대학 간 애들이 갑자기 혼자 화나서 랩을 하는 게 한국 힙합이다'라고 말한다. 솔직히 이건 너무 지나친 비약이고 매도다. 또 구몬 풀고 대학 좀 갔다고 사회 부조리나 자신의 저항정신, 정체성을 랩으로 표출하지 말라 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다만 이 폭력적이고 거친 한국 힙합에 대한 성찰이 짚은 포인트가 있다면, 정말 많은 한국 래퍼들의 분노가 기득권, 즉 위를 향하는 것이 아닌 소수자와 약자, 아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이 사용되지 않은 가사를 찾는 것이 더 힘들 지경이다. 오죽하면 김하온이 '래퍼들은 verse를 채우기 위해 화나 있지', '너와 나를 위해 증오는 빼는 편이야, 가사에서 질리는 맛이기에'라고 말할까. 너무나도 보수적인 사고방식과 혐오가 저항적인 장르를 만나 낳은 혼종에서 벗어나는 것이 힙합 씬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힙합은 이것이 디폴트야, 이것이 정도(正道)야 라고 자꾸만 '옳은 것'을 제시하던 사회에 대한 소수자들의 저항이 만들어낸 장르다. 2017년에 미국 반대편의 대한민국에서 초창기의 그 정신 그대로를 요구하는 것도 무리가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고등래퍼>는 래퍼들에게조차 너무나 바른, 다수의, 정상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규 교육이라는 포맷을 입히고 학교 밖 청소년을 배제한다. 힙합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대에,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그들의 접근 방식이 소외시키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등래퍼>에 출연하는 학교 밖 청소년들을 비롯한 그들이 낙오자나 탈선자가 아닌 그냥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이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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