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한 입] 따뜻한 위로의 도라야끼, ‘앙 : 단팥 인생 이야기’

앞으로 벚나무를 보면 도쿠에씨의 가르침이 떠오를 것만 같다.
글 입력 2018.03.0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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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필름 한 입
<앙 : 단팥 인생 이야기>


한 이 년쯤 된 것 같다. SNS에서 간장 새우 맛집 영상을 보았다. 사장님은 맛있는 간장 새우를 위해서 몇 번의 과정, 몇 십 시간의 정성을 들인다고 하더라. 저 긴긴 과정을 외울 수는 있는 건지, 가끔은 헷갈리겠다 싶었다. 무슨 요리 하나에 저렇게 정성을 들이나, 베베 꼬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요즘은 그런 요리가 더더욱 먹고 싶지만.

이 영화를 보면 딱 그런 생각이 든다. 무슨 도라야끼 빵 하나 만드는데에 저렇게 긴긴 정성이 필요한가 싶다. 11시에 문을 열기 위해 해님이 뜨기 전부터 그날의 단팥을 만들다니. 도라야끼가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야 하는 빵이었던가. 심지어 팥을 들여다보고, 팥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팥만의 시간을 주며 기다리는 도쿠에씨의 단팥 제조는 조금 이상하게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그 이상함에 나도 모르게 울고, 웃게 되는 ‘맛있는 영화’. 바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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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도라야끼 가게에는 한 할머니가 찾아온다. 아르바이트 공고를 봤다며, 시급 200엔도 괜찮으니 본인을 채용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칠십이 넘은 노인을 알바로 쓸 생각이 없는 사장은 그녀를 돌려보낸다. 이후 다시 찾아온 할머니 ‘도쿠에씨’는 본인이 만든 단팥 앙이라며 사장에게 먹어보라고 권한다. 사장인 ‘센타로’는 이를 맛보고 도쿠에씨의 단팥에 매료된다. 이내 도쿠에씨는 작은 도라야끼 가게의 알바생이 된다.

어두운 과거를 끌어안고 팔자에도 없을 도라야끼 가게 사장이 된 센타로는, 모든 것(예를 들어 건조 팥이라거나, 바람이라거나, 나무와 같은)을 정성과 배려로 다하는 도쿠에씨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아간다. 엄마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고 있던 중학생 와카나 역시 따뜻함을 지켜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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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끓이는 건 실례잖아
당과 친해질 동안 기다려 줘야지


도쿠에씨가 단팥을 만드는 긴긴 시간은 팥과의 대화 시간이다. 안 좋은 팥이 있나 살펴봐주고, 조심조심 끓이며 누런색을 빼주고, 김의 냄새가 달라질 때까지 팥만의 시간을 주고, 당과 만나는 순간에는 친해질 수 있도록 뚜껑을 덮어주며, 저어줄 시기가 돼서는 뭉개지지 않도록 살살 저어주는. 이따금 “힘내!”라는 말을 던지며 앙의 맛을 끌어올려준다.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고 특이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하고 특이한 행동을 주욱 보고 있으면, 그 섬세함 속에 세상 모든 것을 향한 감사와 경청이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 도쿠에 씨가 부모님의 억압이 싫다며 투덜대던 중학생 손님들에게 던진 말이다. 학생이니 학업에 충실해야지, 그런 말을 던지는 여느 어른들과는 제법 태도가 다르다. 중학생들은 할머니는 이해하지 못한다며 나가버리지만, 도쿠에 씨는 그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루고 싶었던 꿈을, 함께 있고 싶었던 가족들과의 행복을, 철저하게 타인들로부터 짓밟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도쿠에씨이기에 속박된 존재들에게 던지는 말들이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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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에 할머니 역의 키키 키린은 이 연기가 마지막 연기라 생각하고 배역에 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도쿠에 씨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관중들을 향한 따뜻한 위로와 진심어린 조언이 담겨있다. 진한 상처를 지닌 채 살아온 할머니의 목소리이기에,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센타로들, 와카나들은 더없이 울고 만다. 서로를 이해할 마음이 없는 이 세상 속에 짓밟히는 중에도 뭉근히 내 마음을 토닥여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로가 되는 작품이다.


아무 잘못 않고 살아가는데도
타인을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짓밟힐 때가 있습니다.
또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요.

이런 인생 이야기도 들려줄 걸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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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다가온다. 곧 학교 캠퍼스에는 벚꽃이 만발할 것이다. 어쩌다 봄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걷는 길마다 벚꽃길이 될 테지. 4월 말쯤이 되면 언제 꽃이 피었었나 싶을 정도로 초록 잎의 나무들이 무성해질 것이다. 여름이 되면 날리는 벚꽃 잎이 손에 든 커피잔에 들어갈까 노심초사할 일은 없어지지만, ‘벌써 봄이 갔구나’하는 아쉬움으로 하늘을 훑게 된다.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잠깐 피었다 지는 꽃이지만, 벚꽃은 참 잊을 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매년 봄, 다시 찾게 될 정도로.

도쿠에씨는 센타로에게, 그리고 와카나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벚꽃처럼 빠르게 사라졌지만, 내내 잊을 수 없는 사람. 차분히 살아갈 용기를 주던 사람. 정체불명의 삶이란 여행을 누구보다 귀기울여주던 사람. 그녀가 말하기를, “이세상의 모든 것은 이야기를 가졌다”고 한다. 휩쓸려가는 바람도, 이 작은 건조 팥도, 그리고 세상 초라해보이는 나조차도 이야기를 가졌으니, 천천히 그리고 조심조심, 그렇지만 계속 저어가며 살아가보라는 가르침. 앞으로 벚나무를 보면 도쿠에씨의 가르침이 떠오를 것만 같다.


* 도라야끼 : 핫케이크와 같은 빵 두 쪽 사이에 팥소를 낀 일본 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에서 도라에몽이 좋아하는 빵으로 유명하다.
** 영화 속 도쿠에 할머니를 맡은 키키 키린과 와카나를 맡은 우치다 카라는 실제 할머니와 손녀 사이라고 한다.
*** 우리 나라에서 개봉할 때 '단팥 인생 이야기'라는 부제가 함께 붙어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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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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