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의 비명을 전시하지 말아주십시오 : 연극 < 5필리어 >

글 입력 2018.03.0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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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오필리어는 누구인가?"
< 5필리어 >

원작 셰익스피어 <햄릿>
공동재창작 / 연출 김준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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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연극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좌석에 앉는 순간까지 제발 좋은 연극이었으면 하고 빌었건만. 여성들의 현실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야기가 많지 않은 만큼 이 작품을 보고 실망하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당연히 기대를 걸 수밖에 없지 않나. ‘우리시대의 오필리어’라고 할 수 있는 5명의 여인들을 보여주겠다고 처음부터 거창한 기획 의도를 밝혔으니까. 여기저기서 피고름이 터져 나오는 2018년 대한민국. 성범죄 관련 뉴스가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오고 있는 이 시기에 ‘한국 여성인 나’는 ‘예민하다’. 정치적으로도 적절한 타이밍에 만들어진 연극이기에 극도로 엄중한 시선으로 작품을 평가해야만 했다. 그리고 배신감을 느꼈다.

  답답한 심정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하나씩 짚어본다. 먼저, <햄릿> 속에 나오는 오필리어라는 캐릭터에 연출팀은 일말의 애정을 갖고 있긴 한 것인지 궁금하다. 묻고 싶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이름, 오필리어’를 창의적으로 해석도 하지 않은 채 이름만 그대로 써먹은 것은 아닌지. 여성에 대한 시선이 ‘불쌍하고 안타깝다’라는 정도의 시혜적인 시선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것에서부터 나는 불쾌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피해를 당한 저 여성들의 이야기’로 가둬버리는 것. <5필리어>는 시작부터 잘못됐다.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하소연하지도 못한 채, ‘예쁘지만 미친 여자, 그래서 딱한 여자’ 정도로 그려지고 사라져버리는 오필리어를 2018년에 다시 호명한 것까지는 좋다. 굉장히 빛나는 아이디어였다. 내가 큰 기대를 걸었던 지점도 그 부분이고. 한국사회 안에도 오필리어는 존재하고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흔한 존재들이며, 약자라면 누구든 오필리어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짚어주는 것도 아주 좋다. 그런데 왜 이런 식의 연출이어야만 했는가.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가정폭력 피해자, 데이트폭력 피해자, 세월호 참사 희생자, 문단 내 성폭력, 연예계 성상납 문화 피해자.
 
  한국 사회의 가장 치욕스럽고 핫한 문제들은 모조리 끌고 왔다. 단 하나의 이슈를 다루기도 벅찰 문제인데, 굉장히 큰 포부를 갖고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우려대로 연극은 자신이 다루는 주제를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했다. 포부가 과욕으로 전락하는 건 한 순간이다. 다섯 명의 오필리어 가운데 3명은 심지어 남성 가해자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현란한 1인극으로 보여준다. 이리저리 다양한 자세로 바꿔가면서까지 말이다. 참담했다. 음악을 클럽 음악으로 바꿨다면 3번의 가학적인 스트립쇼로 보였을 것이다. 피해 여성의 피해 사실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포르노그라피적 시선’을 선택하다니. 나만 끔찍함을 느꼈다면 유감이다. 그러나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공연사진 (2).JPG
 

  심지어 등장하는 인물 모두 사회가 생각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전형적인 프레임 안에 가둬진 존재들이었다. 모두가 젊고 어린 여성들이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캐릭터, 꿈 많고 사랑 앞에서 여린 ‘전형적인 여성들’이다. 말이 되는가. 순결하고 순진무구하지 않고 어리지 않으면 피해자에 부합하지 않단 소리인가? 5명이나 무대 위로 올렸으면서 5명 모두가 일괄적으로 똑같은 여성들이다. 개인은 없고 ‘상처 입은 연약한 여성성’을 전시하기에 급급하다. 설정부터가 성급하여 현실성이 전혀 없다. 여기에 ‘오필리어식’ 운명을 짊어진 주체가 어디에 있는가? 순결한 피해자가 얼마나 자극적으로, 어떤 피해를 당했는가에만 집중하는 한국 언론과 뭐가 다른가? 집요하고 변태적이다. 결국 폭력을 폭력으로 보여줬을 뿐이다.

  뜬금없이 세월호 참사를 경험한 여학생의 얘기가 삽입된 것도 내 눈엔 억지 그 자체였다. 전국민적 트라우마인 ‘그 사건’을 가져와서 보여준 이유가 대체 뭔지. 교복 입은 여학생이 아빠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다가 죽는 장면이 도대체 왜 필요하냔 말이다.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에 순종하다 희생당한 무고한 아이들의 모습과 ‘가만히 있어라’라고 강요받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을 겹쳐 보이고 싶었다면 글쎄, 철저하게 실패했다. 아니, 이건 실패 정도가 아니라 나빴다.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지어보려고 애쓴 건 알겠으나 신중에 신중을 가해도 모자랄 사건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데에 이 정도의 노력을 쏟을 바엔 차라리 하나의 진실에 집중하는 쪽으로 가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무대의 마지막 장식에서도 침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5명의 오필리어가 일동 기립하여 한명 한명씩 ‘침묵하지 않겠다’, ‘꽃을 꺾지 말라’ 따위의 말을 격언처럼 읊는다. 여성이 나조차도 너무 민망해서 할 말이 없어지는 장면이다. 무대 위에서 내내 피해자들의 불행만 전시했으면서 갑자기 그녀들끼리 손을 모아 의지를 다잡으며 ‘연대합시다!’라는 뉘앙스로 관객들에게 사회적 다짐을 강요한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임에도 그 전제가 전혀 납득되지 않는다.

  성폭력 문제는 피해자들의 연대와 용기가 1차적인 것이 아니다. 폭력에 대한 방관자들 역시 그 사건들을 둘러싼 정치적 가해자들이라는 지적이 우선적으로 필요하고, 그 방관자들부터 침묵을 깨드려야 한다고 알려야 한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는 전형적인 악인만이 가해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짚어냈어야 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피해자가 중심이 될 수 있는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연극은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그 어느 것도 보여주지도, 암시하지도 않았다.

  <5필리어>는 분명히 제작된 것 자체만으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여성문제를 전면적으로 내세웠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연극 자체만을 위했다기보다는 미투운동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ME_TOO 운동의 의의는 ‘나도 당했다!’라는 무서운 사실이 세상에 까발려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고발한다!”라는 피해자들의 용기에 있다. 단순하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에피소드도 서사적 힘이 없었다는 것은 모든 에피소드에 깊은 애도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건 예의의 문제다.

  고전을 ‘고전’에 입각하여 새롭게 보여주지도 못했고, 현실을 그려내는 섬세함과 이 땅의 피해자들에 대한 배려의 측면에서도 형편없다. 누군가에겐 진짜로 상처가 된 경험일 수 있는 이야기를 이토록 밋밋하게 서술하다니. ‘살려주세요’와 같은 뻔하고 자극적인 구호와 ‘연대하자’는 공허한 외침만 난무할 뿐 존중도, 애도도 없는 난잡한 현장이었다. 폭력의 희생자를 진부한 방식으로 조명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우리 사회 어디서나 관습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비극을 예술까지도 사회의 진부함을 고스란히 답습하며 전시하기만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책임감의 문제다.

  안타깝다. 여전히 비련의 여자로만 대상화되는 지상의 무수한 ‘오필리어’의 삶들이.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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