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렇게 스치고, 지나가고, 스며든다 [영화]

글 입력 2018.02.23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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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유통기한과 D-DAY의 한 끗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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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까봐, 햇빛이 너무 강할까봐 그녀는 오늘도 레인코트에 선글라스를 쓰고 몸을 숨긴다. 마약 밀매업자인 금발의 여인을 맡은 임청하는 영화 초반까지 자신의 속내나 상황을 짐작할 만한 대사를 일절 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들로 그녀의 기분, 감정을 유추할 뿐이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그녀는 이미 드러났다. 기댈 곳 하나 없지만, 남자가 주를 이루는 그 무리 속에서 소리지르고 뛰어 다니며 간신히 선글라스와 금발 가발로 여성의 약한 모습을 가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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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여인과 평행구조로 진행되는 남자는 바로 경찰인 223경관이다. 평행을 이루지만 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달 동안 헤어진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수화기를 놓았다 들었다를 반복하며 집 앞을 서성이는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찌질한 남자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이별한지 한달이 되는 May 1의 날짜로 사가는 장면은 통조림 뚜껑 가장자리에 고여있는 찌꺼기보다 더 찌질해 보이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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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른 둘은, 내몰릴 대로 내몰린 상황에 바에서 마주하게 된다. 마약 밀매가 수포로 돌아가 인생의 목적이 상실된 금발여인과 이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정하게 된 남자는 바에서 함께한다. 금발여인과 남자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사람을 죽인 살인범과 그 살인범을 잡아야 하는 경관으로 만나기도 하는 모순적인 만남인것이다. 결국, 둘은 평행적이면서도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시간의 연쇄적 굴레라는 원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유통기한에 대한 반응이다. 여자는 유통기한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실천으로 옮겨 외국인을 죽인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못하다. 유통기한까지 혼신의 힘으로 버티려고 악을 쓰고 힘껏 괴로워한다. 그렇게 혹독한 둘만의 유통기한을 한 공간에서 보내게 된다. 



EP2. 우천시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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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633경관과 페이. 633경관 또한 이별을 맞이한다. 하지만 223경관과는 사뭇 다르게 이별은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이별의 깊은 감정의 골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밖에서는 씩씩하고 용감한 경관으로 불리지만 집만 오면, 집안의 모든 잡다한 것들에 감정을, 생각을 부여한다. 여자친구가 떠난 집은 쉴 수 있는 안식처의 기능을 하는 가구들이 아닌, 온통 감정적인 가구들에 불과하다. 너무 슬퍼서 눈물을 머금고 찢어져버린 수건과 몸매 관리를 하지 못하고 뚱뚱해진 비누, 하얀색의 인형이었지만 상처로 인해 주황색으로 변해버린 인형과 저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 옷들까지 전부 633경관의 심경 대변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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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끙끙 앓던 633경관의 집은 끝끝내 참았던 울분을 터뜨린다. 집에 물난리가 난 것이다. 그동안 집의 손과 발이었던 가구들로 조금씩 표출하던 자신의 감정들이 폭발한 것이다. 이 모든 결과들의 시발점이자 과도기의 중심이었던 페이의 행동도 발각이 되지만633경관은 어느새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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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만든 왕가위 감독의 초기영화 (열혈남아)때만 해도 왕가위의 남자 주인공을 향한 묘사는 거칠고 투박했다. 하지만 (중경삼림)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내뱉는 남자 주인공들을 섬세하게 나타낸다. 집 안의 세세한 것들에 감정이입하여 자신의 상황을 나지막히 읊조리는 모습은 내 생각 속, 아니 모든 관객들의 뇌리 속에 깊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젖다 못해 축축해져 다시는 비행을 준비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준비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633경관은 우천시로 취소되어있던 자신의 비행 경로를 정한다. 페이와 633경관은 각자의 캘리포니아를 가는 것이 아닌 둘만의 미국을 가는 결말을 맺으며 아담하지만 화려하게 에피소드의 막을 내린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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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식 옴니버스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 왕가위 영화였다. 일단, (열혈남아)에서 표현했던 수단적 요소인 여자를 놀랄 정도로 능동적이며 펑키한 여자로 표현했다. 비록 남우주연상은 양조위가 수상하였지만 페이역을 맡았던 왕페이 또한 페이라는 역할이 섬뜩하고 사랑스러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달콤살벌'이라는 말은 페이라는 캐릭터를 보고 만든 말이어도 믿을 지경이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보았을때, 저 깊숙히 숨겨두었던 시각의 능력을 쓴 마냥 에피소드1에서 주가령, 633경관, 페이 모두가 보인다. 복선으로 봐도 충분하다. 주가령이 나타난 시점은 금발여인이 자신이 밀수한 마약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때이다. 주가령은 자신 스스로가 남자를 떠나지만 다시 마음을 돌려잡고 남자에게 돌아가고자 하였지만 결국 잘 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633경관이 보인 장면은 223경관이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며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이다. 영화 전반적인 주제일만큼 많이 드러났던 633의 이별을 암시하듯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633경관에게 자신의 이별을 전도라도 하러 가듯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세 번째는 페이이다. 금발여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한 안에 지키려고, 아니 파괴하려고 남의 딸까지 납치아닌 납치를 하는 극한의 상황까지 치닫은 상황에서 대조적으로 대형 주황색 가필드 인형을 두 팔로 한 껏 안은 채 가게에서 나가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 부분도 주목할 만 하다. 아이를 납치한 극단적 상황과 더불어 후에 페이에게도 남의 집에 무단침입을 하고, 자신의 물건들로 집을 꾸미는 일상 속에선 상상도 못할 극단에 치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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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2의 이들은 1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린다. 두 에피소드 모두 시작할때,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치던 그 순간 그녀와의 거리는 0.01cm, 57시간 후 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치던 그 순간 그녀와의 거리는 0.01cm, 6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라는 대사로 시작한다. 우연 속에 마주친 인연들은 그 어떠한 것보다 특별해 보이고 대단해 보인다. 하지만 그 역시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 그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한 끗 차이는 얼마 남지 않은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통기한도 아니고, 어쩌다 얻게 된 그 남자의 집 열쇠도 아닌 그 우연을 만지작 거리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이다. 그 손가락들이 맞닿게 되는 우연들을 그저 스칠것인지, 지나칠것인지, 스며들게 할 것인지는 손가락의 선율에 따라 흘러갈 것이다. 이렇게 또 한번 읽는 당신과, 쓰는 나의 인연은 스치듯 스며들었다.


[강인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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