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슷하지만 다른, 그래서 의미 있는 : 패터슨 [영화]

글 입력 2018.02.23 00:1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아, 그냥 그때 이렇게 했었더라면...'


누구나 다시 시작하고 싶은 날이 있다. 사실 이 생각은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고 싶어 하고, 행여나 실수하는 날에는 꽤 길게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라 언젠가부터 나의 목표는 실수 없는 완벽한 하루였던 것 같다. 어디선가 방송인이자 모델인 홍진경 씨가 했던 말을 써놓은 사진이 본 것이 생각난다. 그녀는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 또한 행복한 하루가 그와 같았다. 후회도, 실수도 없는 완벽한 하루. 하지만 사람인지라, 종종 말과 행동을 곱씹으며 소위 말하는 '이불킥'을 한 적이 대부분이다. 완벽한 하루는 내게 많지 않았다. 그때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원망스러웠고 애초에 실수를 한 나 자신이 밉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후회 없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꿈꿔왔다.


movie_image3.jpg
 


평범한 일상과 평범한 사람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나온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 여행자.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쓰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포기한다. 그는 사랑을 하며 성숙해지고 시간 여행을 조절해나간다. 후에 시간 여행의 참된 방향을 터득한 그는 하루는 일반인처럼 보내고, 시간 여행을 통해 그 하루를 다시 맞이하며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돌아본다. 수정하지 않은, 날 것의 그 하루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완벽하지 않은 일상도 배울 것이 많다고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 패터슨도 시사하는 점은 비슷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패터슨에게는 시간 여행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하루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평범한 버스 운전사인 '패터슨'의 하루는 지극히 지루하고 반복된다. 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버스 회사로 출근하고 퇴근 후 자신의 개 '마빈'을 산책시키며 단골 술집에서 한잔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 하지만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는 틈틈이 시를 쓴다는 것이다. 그가 위대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고향 '패터슨'에서 살고 있는 아마추어 시인 패터슨이라는 것도 어쩌면 특별한 우연 중 하나다. 그가 써 내려가는 시는 우리나라 시와 달라, 가슴에 콕 박히는 시는 아니지만 잔잔하고 담담하다. 그의 시들은 정말 소소한 취미로 작성한 것이라 복사본도 없고, 유명하지도 않아 그와 그의 아내만이 공유할 뿐이다. 하지만 그가 꾸준히 시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가 얼마나 시를 사랑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딱 그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다.


movie_image.jpg
 


비슷하지만 다른, 그래서 의미 있는


시를 쓴다는 것 이외에 그의 하루는 특별하지 않다. 영화는 러닝 타임 동안 그의 일주일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 보이기도 한다. 긴장감도 별로 없고 비슷한 하루들은 영화 속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못 미칠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그의 삶은 너무도 잔잔한 일상이기에 조금이라도 맥거핀처럼 보이는 영화적 요소에 관객 스스로 반응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대사, 행동들을 과대 해석하며 그의 삶의 스펙타클 해지는 것을 기대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는 그게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그의 하루하루는 비슷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는 늘 같은 버스를 운행하지만 늘 같은 사람을 태우지 않는다. 승객들의 대화 주제도 하루하루 다르다. 가끔 예상치 못한 이벤트처럼 전기가 나가서 버스를 교체하는 일도 벌어진다. 술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매번 같은 맥주를 마시지만 술집에서의 시간도 늘 똑같지는 않다. 어떤 날은 꼬마 시인을 만나기도, 어떤 날은 사랑하는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우리들의 시간도 그렇다. 늘 특별한 하루를 기대하지만 그런 날이 매번 있을 수는 없다. 특별한 하루는커녕 후회로 가득 찬 나날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또는 돌이켜봤을 때야 그 날이 빛나는 하루였음을 깨달을 때도 있다.

나는 항상 하루가 알차야 마음이 편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면 불안하고 하루를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곤 했다. 특히 스무 살 초반의 나는 바쁜 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로 대학 생활은 바빠야 하며 그런 생활이 나를 빛나게 해준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평범한 하루들이 너무도 지루해 보였고, 더 나아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내 주변 사람들의 하루는 저렇게 빛나는데, 그들은 늘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데.'라는 말로 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의미 없게 지나간 날들은 없었다. 인생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것 같아도 우리의 하루는 늘 똑같을 수 없다. 그 하루가 지독히 지루하고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차지 않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그 속에서도 분명 나비효과처럼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movie_image2.jpg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시집을 잃은 패터슨은 한 일본인을 만나게 된다. 그 이후 패터슨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에서 보여준 패터슨의 일주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계속 버스를 운전할 것이고 잠깐의 좌절이 있었지만 시도 계속 써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별거 없었던 그 만남이 계기가 되어 그가 시인으로 데뷔하는 날도 있을지 모른다. 별거 아닌 것 같았던 작은 날이 돌아보면 중요하고 크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우리는 늘 무엇인가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 그것이 정말 작고 순간의 찰나였더라도 우리는 예상치 못한 그 하나 때문에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 알찬 하루를 살지 못했다고 느껴져도 실망하지 말자. 평범해 보이는 그 하루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사실은 특별하니까.




TAG.jpg


[조수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