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환상 : 일루셔니스트

글 입력 2018.02.2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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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제외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마술영화에 환상을 심어주는 마술사는 없다.
환호하는 관객도 눈에 띄는 색감도 없다.
캐릭터의 대사마저 손에 꼽는다.
magician이 아닌 illusionist의 영화
magic이 아닌 illusion을 그린 영화
 
그야말로, 우울한 환상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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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도 제대로 된 한국어 예고편 하나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접한 나와 같은 사람들은 무채색 화면에 한 번 놀라고, 이어지는 상황에 계속해서 찝찝할 것이다. 기대했던 마술의 이미지와는 달리 느린 템포의 음악과 흑백 화면, 마술사에게 덤비는 토끼와 어설픈 마술. 관객들은 물론이요, 관중 앞에 서있는 마술사의 표정까지도 밍밍하기만 하다. 무대장치를 손보는 와중, 시간을 벌기 위해 일명 대타로 무대에 세워진 이 인물은 이름조차 공개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는 결코 주연이 아닐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의심하지만, 다행히 흑백연출에 이어 공연장 간판에 색이 칠해지고 나면 자연스레 예상할 수 있다. ‘그럼 그렇지. 영화가 이제야 시작이로구나. 초라했던 마술사가 성장하고 행복해지는 그렇고 그런 해피 스토리.’

그리고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금 깨닫는다.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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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 색이 더해진 후에도 상황은 심각하기만 하다. 팝 스타에게 밀려나 무대 시간이 뒤로 밀리고, 뒤늦은 무대에서마저도 관객에게 야유를 듣는 마술사. 마술이 더 이상 환호 받지 못하는 구시대의 산물로 취급되는 시대인 것이다. 주인공은 그 자체로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나는 OLD의 상징이다. 초라한 마술사의 짐은 옷가지를 담은 캐리어와 하나뿐인 포스터, 그리고 철창에 가둔 토끼가 전부다. 포스터를 붙이고 떼면서, 마술사는 정착하지 못하고 돈벌이 할 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마술사가 있는 곳은 어디나 어두운 조명과 함께다. 그나마 밝은 조명이 자리한 곳은 분장실 거울 앞.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으나, 밝은 빛이 비추는 것은 언제나 어린 소녀의 사진이었다. 이 영화가 프랑스의 거장 자크 타티의 각본으로 탄생되었으며 연출과 캐릭터까지도 그를 오마주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진 속 소녀는 자크 타티의 딸 소피를 상징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술사는 사진을 들여다보는 행위만으로 아버지로서의 캐릭터를 충분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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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게 밀려나는 그에게 설상가상으로 보듬어야 할 존재가 생기면서, 마술사의 아버지 역할은 사진에 그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마술을 하던 중에 만난 어린아이 앨리스가 난생 처음 보는 마술에 그를 동경하고, 마술사 몰래 그의 다음 여정에 뒤따라온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을 통해 익히 알고있는 앨리스와 같이, 이 앨리스 또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의 모든 행위가 진짜 마법이라는 믿는 아이를 위해, 마술사는 보호자에 그치지 않고 마법사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앨리스와 마술사는 여정의 동반자이지만 동시에 강하게 대비되는 인물로, 주인공의 우울을 강조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마술사는 영화 초반부터 우리는 소녀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마술사는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다. 하지만 정작 마술사의 이름은 영화 끝까지 단 한 번도 보여지지도, 불리지도 않는다. 포스터 속 작은 글씨만이 그의 존재를 말하는 전부인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나의 이름은 곧 나의 존재가치를 의미한다는 것을. 작품 내에서 주인공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다.

마술사가 시대에 뒤처지는 한편 앨리스는 NEW에 해당하는 인물로, 앨리스의 성장과 함께 마술사의 쇠퇴가 도드라진다. 소녀는 자라날수록 철이 드는 대신 마법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고, 마술사는 급기야 앨리스 몰래 공연 이외의 시간에 다른 일을 부업으로 삼는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여자 속옷을 홍보하기도 하고, 세차장에서 새벽을 보내며, 술잔을 건네기도 하면서. 이름조차 없는 마술사의 유일한 존재성이 마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생계를 위한 마술사의 발버둥은 주인공의 존재성이 완전히 상실되었음을 의미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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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이전의 것들을 전부 벗어던지고 자신이 믿는 마법을 통해 얻은 것들로 온 몸을 치장한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그녀의 머리핀마저, 새 하늘색 드레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는지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몸 어디에도 이전의 잔재가 남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마술사에게 받은 부모의 사랑이 아닌, 남녀의 사랑으로 날아간다. 앨리스의 성장이 종국에는 마술사의 곁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마술사는 타인의 환상을 지켜주는 역할이다. 정작 그런 마술사에게는 환상도 마법도 없었다. 하지만 마술사는 앨리스를 만나, 무대 밖에서마저 그 우울을 숨겨야했다. 누가 이 마술사를 알아줄 수 있단 말인가.
        
훨씬 더 많은 디테일과 조연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담긴 영화다. 감정을 나누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글이었기에, 영화를 꼭 함께 보고 싶은 마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들과 결말을 피하려 애썼다. 꼭 언급해야 할 부분들을 제외하고 영화를 나누자고 말하는 것이 아이러니일 수 있겠다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함께 나눌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여겨질 때,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장면들과 결말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앨리스와 마술사 관계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겠다. 영화를 볼 때 눈여겨보면 좋을 장면들을 공유하며, 아쉬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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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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