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옥자', 존재에 대한 인정과 존중

글 입력 2018.02.22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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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육식'은 자주 묶이는 키워드이다. 둘 모두 잘못된 것으로 확연히 단정지어질 수는 없으나 그 추악한 이면은 항상 논쟁거리가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당연히 보편적으로 소비된다는 것에 있어 공통된다.이 영화는 그 심오한 두 가지 의제를 어렵지 않게 직접적으로 들춰내는 오락영화이다.

같은 봉준호 감독의 작품인 <괴물>과 <설국열차>가 절묘하게 배합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인간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동물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많은 관객이 <괴물>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CG 퀄리티 디테일은 엄청났다는 개인적 감상)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 영화는 시종 인간들의 이면성과 모순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괴물>과 맞닿아있다.<괴물>에서 괴물을 만든 것은 인간의 욕심과 인간중심적 사고이다. 그 중심에 있는 인간(특히 지배층)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희생자임을 강조하며 책임에서 탈피하려 한다. 괴물을 피해 도망가기만 할 뿐, 괴물의 근원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는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원인을 제공한 인간이 오히려 피해를 주장하는 이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옥자>는 선과 악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구분하여 관객들이 선의 편에 서서 악을 규탄하는 일반적인 구조를 거부함으로써 관객의 이면성에까지 눈을 돌린다. 슈퍼돼지를 비윤리적으로 생산해내어 이윤을 취하려는 루시의 모습은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듯 완전히 싸이코패스같다.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원적인 인물보다 관객의 마음에 더욱 깊숙히 박히는 것은 선악을 딱히 규정하기 힘든, 현실적이며 입체적인 인물이다. 바로 ALT(동물보호단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동물 애호가이며, 동물과 환경을 사랑하고, 주인공(미자)을 도우며 주인공의 친구(옥자)를 악당들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전형적인 선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미자와 함께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께 전달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또한 동물 보호의 커다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옥자를 희생시키려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 학대를 비판하지만 동물은 소비하고 싶은, 우리들의 이중성을 ALT를 통하여 투영하는 것이다. 관객은 선악을 제3자로서 선악을 나누고 그들을 팔자 좋게 지켜볼 수만은 없다. 그 지적의 손가락질은 결국 우리를 향한다.

'미란도'로 대표되는 기득권과 그에 반하는 평범한 하층 계급의 시민이 맞서 투쟁하는 이야기 구조는 <설국열차>와 유사하다. 기득권을 대표하는 인물을 두 영화 모두 틸다 스윈튼이 맡았다. 이미지는 사뭇 다르지만, 어쨌든 백인 여성의 소름끼치도록 냉혹하고 인정없는 모습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엄청난 명성의 할리우드 배우의 아우라에 맞서는 배우는 두 영화 모두 '차가운 도시 여자'와는 거리가 먼, 작은 한국인 여자 아이이다. 옆 동네에 있는 학교 다닐 것 같은 평범한 여자 아이가 특별한 능력과 멋진 의지를 발휘하여 기득권과 투쟁하고 희망의 씨앗을 만들어내는 그림은 가히 흥미롭다. <옥자>에서는 안서현 양이 화려한 액션까지 선보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선사한다. 봉 감독이 두 차례에 걸쳐 동양인, 여자, 아이를 영웅적인 인물로 설정한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된다.

<괴물>에선 인간중심적 사고와 우리나라의 현실을, <설국열차>에선 계급사회를 꼬집었다면 <옥자>에선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자본주의와 육식을 지적한다. 두 가지 주제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이 굉장히 적나라해서 역하기까지 하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핏물 가득한 도살장에서 도살을 명령하는 낸시가 미자가 내놓은 금돼지를 보고 일순간에 미소를 짓는 모습은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나타나는 표정의 변화는 자본주의의 무서움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육식의 역겨움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직접적이다. 끔찍한 실험실과 도살장, 감금된 채 학대당하는 돼지들, 산 채로 떼어져나가는 살점.. 디테일한 시각적 효과로 관객으로 하여금 공포의 정서를 자아내는 방식이 역시나 탁월했다. 엄청난 메타포를 예상하고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 없이 가볍게 보고 있어도 주제의식이 전달된다. 서두에 '오락 영화'라고 언급한 것이 그 때문이다. 단순 재미를 위해 감상한다 하더라도 감상에 손실이 없을 것이다(그래도 당분간은 돼지고기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자본주의에 대항하라는 것일까?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것일까?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떠오른다. 이 소설에서 아내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은 육식을 강요당하는 것으로 상징된다. 그녀에 대한 억압의 형태는 굉장히 동물적이다. 남편이 강제로 잠자리를 요구하고, 가족이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는 행위 등은 마치 도살장의 도살자를 연상하게 한다. 동물에게 그러는 것처럼 그녀의 정체성을 죽인다. 채식이라는 최소한의 자유라도 갈망하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에 대한 가치의 인정과 사랑이다. <옥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도 이와 상통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미자가 옥자와 귓속말을 하며 미소를 짓는다. 무슨 말을 나누는 것인지는 들리지 않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했냐는 것보다 미자와 옥자가 서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공유하는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돼지를 '먹을 것'이 아닌, 그 자체로 특별한 존재로 소개하는 것이다. 이전 장면에서 도살장에 빼곡히 갇혀 있던 돼지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남겨놓고 온 미자는 그들의 존재의 가치를 기억하고 인정함으로써 그들을 해방시키고, 그것은 채식을 하는 행위로 표현된다. 결말부가 별 다른 내용없이 단란한 식사 장면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 내용의 공백에서 관객을 향한 일종의 권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존재에 대한 인정과 존중, 내가 <옥자>에서 느낀 것은 이러하다.



[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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