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질문하고 싶어지는 문장들, 박준 산문집 [문학]

글 입력 2018.02.22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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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서 접수를 앞두고 어느 학과에 진학할 지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국어국문학과에 가고 싶었다. 수업들 중 국어, 문학 시간이 가장 재미있었고 매년 돌아오는 새 학기의 낯선 환경에 마음이 적응을 못하고 힘들었을 때 유일하게 편안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을 읽고 분석하는 일이 조건 없이 즐거웠다. 괴로운 수능 공부도 국어 과목 만큼은 극단적으로 괴롭지는 않았다.

 막학기 복학을 앞둔 지금, 국어국문학과 학생은 되지 못했지만 여전히 시와 문장들을 좋아하고 가까이 두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더 깊은 배움으로 나아가지 못한 덕에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좋아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수업시간에 문학작품을 배울 때면 핵심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 구절에서는 어떤 기법을 사용했고, 이런 것들을 받아 적으면서 시인에게 ‘정말 그렇나요?’라고 묻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만큼 시나 소설을 읽을 때는 저자의 세계가 어떠했는가를 상상하게 된다. 그세계 어딘가로부터 뽑아져 나온 생각이 단어로, 문장으로 읽히고 나의 세계를 바탕으로 해석 될 때 실제로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음에도 소통을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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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도 아주 힘들었던 시기에 놓여있을 때마다 박준 시인의 글이 내게 왔다. 제목에 이끌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시집을 도서관에서 빌렸던 날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소리 내어 시를 읽어 보기도 했다.참 신기하게 어렵고 어두운 시들이 많았지만 뭔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주파수가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시들이 마음을 탁탁 치고 들어왔다. 며칠 전에 부산에 갈 일이 있어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너무 붕 뜨길래 서점에 들어갔다. 마땅히 끌리는 책이 없어서 그냥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샀다. 이 날도 이 책을 사고 기분이 잠시 좋아졌다. 즉흥적으로 책을 사는 일이 잘 없는데 ‘또 보네요!’라고 외치고 싶은 반가운 기분이었다.
 
 이전에 읽은 시집이 좀 더 추상적이고 시적이어서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면 산문집은 조금만 마음을 열면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의 기록들이 모여 있었다. 몇 편의 시들도 함께하고 있는데 그의 산문은 긴 글 임에도 뭔가 시처럼 읽혔다. 다른 시인이 쓴 산문을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기교나 꾸밈이 없는 담백한 문체가 좋았다. ‘담백하다’는 말은 내가 개인적으로 칭찬의 의미처럼 쓰는 표현이다. 담백한 인상, 담백한 말투, 담백한 관계 등 자극적이지 않고 담담한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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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으로 내려가는 답답한 기차 안에서 책을 읽고 있자니 책을 산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일기장을 주운 것 같은 신비한 설렘으로 가득해졌다. 어떤 연유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이 글에 담긴 일화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부연설명 없이 온전히 스스로 글을 이해해야 하는 백지상태가 자유로움으로 다가왔다. 생각 없이 곧장 집어 들어서 산 책으로 참 많은 걸 느끼고 마음 속이 위로의 문장들로 채워졌다. 글을 읽으며 속으로 시인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좋은글을 더 많이 읽고 쓰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해주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박준 시인 ‘여행과 생활’ 중에서


[최은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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