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 허기와 채움의 숲

글 입력 2018.02.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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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영화 티저 영상이나 포스터를 보고 ‘아 시골에서 건강한 음식을 먹고 옛 친구들과 추억을 쌓는 그런 힐링 영화구나’라고 생각했다. 도마 위에 칼질을 하는 소리, 보글보글 냄비가 끓는 소리, 거기에 담담한 어조로 레시피를 설명하는 혜원의 목소리까지 얹어지니 초반 몇 분은 나영석 피디의 ‘신혼일기’(구혜선-안재현 편)가 생각나기도 했다.

으레 이런 종류의 영화는 관객에게 가지지 못하는 낭만을 보여준다. 그래도 흔한 패턴인 ‘못난이가 공주가 되어 성공’ 하거나, ‘여행을 갔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심의 직장인들이 절대 가지지 못할 ‘전원생활’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첫인상은 분명히 낭만적이었다. 이에 더해 실패한 고시생과 대기업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캐릭터를 집어넣음으로써 청년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니까, 여러 면에서 안전한 방향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첫인상과는 다른, 조금은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배가 고파서 왔어"

‘리틀 포레스트’는 처음부터 혜원의 ‘허기’에 집중한다. 갑자기 왜 돌아왔느냔 은숙의 말에 덤덤히 ‘배가 고파서’라고 대답한 혜원은, 은숙이 장난하지 말라며 재차 묻는 말에도 ‘진짜야’라고 말하며 멋쩍게 웃는다. 추운 겨울 혜원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은 그래서 밥을 먹는 일이었다.
 
사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다’는 일련의 행동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아주 당연한 과정이다. 은숙이 혜원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없는 이유다. 배가 고프면 어디서든 뭐라도 먹으면 해결될 일 아닌가? 그러나 혜원의 허기는 그렇게 충족될 수 없었기 때문에 혜원은 원래의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은숙이 나름대로 진단한 ‘고시 실패’와 ‘헤어지기 직전의 남자친구’도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누구라도 알 것이다. 혜원의 허기처럼, ‘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허기가 있다는 사실을.



'허기'의 종류

혜원이 계절별로 알맞은 식재료를 선택해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관객에게 눈과 귀가 즐거운 과정인 한편, 혜원이 ‘마음의 허기’를 채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혜원이 만드는 모든 음식은 엄마를 구심점으로 삼는다. 혜원은 음식을 만들고 먹으며 엄마가 했던 말, 엄마와 있었던 일, 엄마의 표정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 때문이다. 마치 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사계절동안 천천히 복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마치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과정과도 닮았다. 혜원의 엄마는 죽지는 않았지만 부재한다는 사실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애도는 산 사람을 위한 일이듯, 혜원은 자기 자신을 위해 엄마를 끊임없이 떠올리고, 추억한다.

이런 점에서 아이러니하지만 ‘리틀 포레스트’는 혜원의 허기가 발생한 근원점이기도, 해결책을 보유한 치유의 숲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동안 함께 지낸 시간이 혜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겨낼 힘이 될 것이라 예견한 엄마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 '무슨 일'이 바로 엄마를 향한 혜원의 그리움과 배신감, 그리고 왠지 모를 자존심이 한데 뭉그러진 일일 거라는 사실은 몰랐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허기를 채우는 일은 식욕만을 해결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담담한 그림으로 그려냈다. 계절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은 곧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일이기도, 그 계절에 엄마와 쌓았던 추억을 떠올리는 일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곶감이 맛있어진다는 것은, 겨울이 깊어졌다는 것이다”는 혜원의 말은 그저 겨울에 난 곶감을 먹고, 맛있는 곶감을 먹으며 깊어진 겨울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편으론 이토록 자연스러운 일이 혜원에게 꼭 필요했던 일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것은 ‘리틀 포레스트’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 같기도 하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혜원의

그래서 당장 ‘리틀 포레스트’로 갈 수 없는 현대인들은 영화를 통해 힐링도 하지만 한숨을 내쉴 수도 있다. 혜원이 그랬듯 고시원에서는 편의점 도시락을 먹게 되는 일이 허다한 것처럼, 이것은 비단 물리적인 장소의 문제처럼 여겨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리틀 포레스트’는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혜원의 이야기라고 하면 어떨까. 단지 혜원의 허기의 원인이 엄마가 떠나간, 그리고 동시에 엄마와 함께한 ‘리틀 포레스트’에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관객 각자의 리틀 포레스트는 서로 다른 장소, 혹은 기억에 버티고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중요한 건 바쁜 일상속 점점 무게를 잃어가는 배고픔에 한 번쯤 지위를 주고, 들여다보는 일이다. 혜원이 조금은 부끄러울지라도 솔직하게 "나 배고파"라고 말했던 것 처럼, 그것이 식욕이든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이든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지나간 시간을 복기하는 일, 혹은 허기가 발생한 근원부터 되짚어 나가는 행위는 혜원이 그랬던 것처럼 각자가 '아주심기'를 해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지도 모른다.


[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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