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한 구절 [기타]

글 입력 2018.02.2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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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쓰인 활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읽는 게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독서는 부담이 되기 쉽다. 사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이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고, 또한 책을 전부 읽지 않았다고 해서 그 책을 읽은 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법이다. 단 한 줄이라도 두고두고 머리에 새기고 가슴에 남길 구절을 만난다면, 그 한 줄로 인해 내 인생이 조금 달라졌다면, 그것으로 독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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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의 중요성을 극대화한 갈래는 시(詩)가 아닐까 싶다. 간결함 안에 묵직한 울림을 담은 시는 마치 진한 에스프레소같다. 그러나 산문, 특히 소설의 경우 책 전체를 읽어서 전체 줄거리를 알아야만 그 책을 '읽었다' 내지는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에서 특정 구절보다는 전체 서사의 흐름이나 인물 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중요시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역시 소설의 줄거리가 어떻고 인물이 어떻고 하는 소설에 대한 '정보'보다는, 그 소설이 나에게 무슨 의미였는지가 더 중요하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며, 따라서 이 소설이 나에게 특별해지는 데에는 정보보다는 의미가 기여한다. 특정 인물의 특정 대사나 행동, 소설의 배경이나 문체 등 각자에게 와 닿은 '한 구절'이 어디였는지를 아는 게 그 소설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는 것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겠다는 심정으로 책을 읽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샀다는, 혹은 읽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안 읽히는 책과 씨름하고는 한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매몰비용에 집착하는 셈이다. 그러나 책 역시 일종의 대화이다. 친구 수다 들어주다가 재미없으면 건성으로도 듣고, 수업 듣다가 집중 안 되면 딴생각 잠시 하면서 안 듣는 것처럼 읽다가 안 읽히는 부분은 과감히 넘어가고 흥미로운 부분만 찾아서 읽어도 그 책에 대한 이해에는 아무 상관없다(물론 학술적 목적에 의한 독서에는 당연히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말보다 글로 소통할 때 종종 '이해'라는 부담과 의무감을 느끼게 되고는 하는데, 책을 빈틈없이 이해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오히려 책에 대한 이해를 저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얘기가 전부 내 귀에 쏙쏙 들어올 리 없다. 정보가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는 내가 관심 있는 내용만 골라 읽는 것도 벅찰 것이다.

이러한 독서법을 말하자면 발췌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소위 날림으로 책 읽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어 교육과정에서 학생의 생각을 묻기보다 자꾸 작가의 생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부터 강조하는 게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다. 발췌독을 한다 해도 최소한 나에게 의미있었다고 하는 책의 구절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없어야 할 것이다. 물론 책에 따라서 '이해' 자체가 여러 개가 나올 여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 작가가 하는 말을 왜곡 없이 읽은 뒤 그것을 기반으로 나의 생각을 만들어야 한다. 그저 자기가 읽었다는 책 수를 늘리기위한, 한마디로 양(量)적 목적에 의한 발췌독은 지적 악세사리일 뿐이다. 책의 큰 맥락과 저자가 하는 말은 올바르게 이해하되 관심도 없는 지나치게 세세한 내용까지 읽어야 한다는 부담은 없을 정도의 적절히 현명한 독서가 필요하다.

발췌독은 비단 책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 연극, 공연,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한 구절'을 만나고는 한다. 그 영화 내용은 기억 안나는데 배경 음악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돈다든지, 그 콘서트 노래는 별로였는데 기타리스트가 멋있었던 건 확실히 기억난다는지 등 각자 마음속에 꽂힌 구절들은 모두 다를 것이다. 결국 무슨 영화를 봤다, 무슨 콘서트에 갔다 왔다,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나에게 어땠는지, 그것만이 남는 것이다.
특히 여행에 있어서 발췌독과 같은 자세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유독 여행을 갈 때에는 종종 '한 구절'의 중요성이 잊히기 때문이다. 경비가 많이 드는 해외여행이나 몇 박씩 시간을 들이는 국내 여행을 가면 흔히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에 지배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한 번 여행을 갈 때 최대한 '많은' 장소를 가고,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음식들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행 목적이 현지 조사나 여행안내서 작성이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많은'들에 치여 패키지 투어 같은 빡빡한 일정을 쫓아가기만 하다가 그만큼 빡빡한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게 여행을 갔다 온건가 싶다. 내가 여행을 하는거지, 여행이 나를 끌고 다니는 게 아니다.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까워 의무감과 불안과 초조감에 하는 여행은 차라리 안 가느니만 못한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정말로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깝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 마음에 드는 예쁜 호숫가에서 몇시간이고 하염없이 앉아 있어 보기도 하고,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음식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함께 온 사람들과 그 맛을 나누고, 그러다보면 그 장소, 그 음식은 한동안 나에게 남을 나만의 '한 구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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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한 구절'이 된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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