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도대체 그녀들은 왜 그랬을까_연극 그녀들의 첫날밤

글 입력 2018.02.08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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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로 연극’이라는 제목을 단 한 웹사이트의 리스트를 뒤지다 보면 조그만 원룸에 틀어박혀 머리를 대충 틀어 올리고 커다란 안경을 쓴 채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눈앞에 대학로가 펼쳐지는 것만 같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별의별 연극이 무대에 오르고 있고 혹은 오를 예정임을 알려주는 스케쥴덕분에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이 더더욱 요지경이 되는 것인데, 요지경인 대학로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즐거운 취미다.

 <그녀들의 첫날밤> 여느 때와 같이 연극 제목을 바삐 훑어보던 중, 두 눈이 한 군데 멎었다. 첫날밤.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든 그렇지 않든 ‘첫날밤’이라는 단어가 주는 야릇한 느낌이 있지 않은가. 연극은 그 한 단어만으로 은밀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미끼를 던지고 있었고, 연극 제목을 클릭했을 때, 나는 기꺼이 그 미끼를 물겠다는 심정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첫날밤이라는 것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그녀들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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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터엔 종이봉투를 뒤집어 쓴 남자 한 명이 서 있고, 양 옆으로는 여자 셋이 나란히 서있다. 헤어스타일, 복장, 표정, 풍기는 분위기까지도 제각각이다. 사진 속 세 명의 여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라고는 ‘여자’라는 성별뿐인 듯하다. 무기를 든 두 명의 여성을 보면 아무래도 남성이 ‘피해자’인 것같은데, 그럼 우두커니 서서 남성을 지그시 응시하는 저 여자는 또 뭘까. 그 날 밤,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놉시스

 생계형 살인청부 업자인
‘코카’와 ‘트리스’
그녀들은 킬러지만
공과금과 아이들의 교육에 얽매여 살고
친구의 결혼식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들은 쪼들리는 생활 때문에
의례적으로 살인이 아닌
한 남자의 납치를 맡게 되고,
납치를 마치고 쉬고 있는 그녀들의 사무실에
그 납치를 의뢰한 ‘노비아’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그녀는 오늘이 결혼식이었다는 말을 하고
코카와 트리스는 그 결혼식의 신랑이
자신들이 납치해 화장실에 넣어둔
남자란 걸 알게 된다.

납치의 이유를 묻는 그녀들에게
노비아는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의심이 시작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성폭행의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 되지도 확신할 수도 없는 사실이지만
그 작은 이야기는 의심을 낳고
믿음을 깨뜨리게 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코카와 트리스는
이제는 어찌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할 때라며 방을 나가고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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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봐도 노비아는 지극히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이다. 비록 자신의 예비 남편을 납치해달라고 의뢰하긴 했지만, 범죄를 두려워하고, 교제하는 남성의 과거를 의심하는 행위, 아니 더 근본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비롯된 공포심과 불안감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을 여성이 얼마나 될까. 언뜻 보면 노비아가 대표적인 ‘평범한’ 여자로, 킬러인 나머지 두 여자와는 달라 보이지만, 코카와 트리스라고 해서 결코 이런 부류의 공포심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이 조심하고 감내해야 할 두려움은 국적, 연령, 직업을 비롯한 모든 배경을 초월한다. 물론 어떤 불합리한 의심과 근거 없는 판단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 때,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촉각을 곤두세우고, 어둠의 그림자가 자신을 덮치기 전에 먼저 비명이라도 내질러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납치라는 행위, 킬러라는 직업을 과연 정당화할 수 있을까. 남자가 성폭력범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코카와 트리스는 분명 사회의 약자이지만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는 가해자이기도 하고, 납치된 남자는 어찌 됐든 이 상황에선 피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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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우리나라 대표 포털 사이트 뉴스 란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걸렸다고 생각해보자. 실로 그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다. 댓글은 정치판을 방불케 하는 진흙탕 이 될 것이고, 온갖 비난과 언어폭력이 난무할 게 뻔하다. 하지만 그런 난장판 속에서도 커다란 두 갈래의 진영이 생겨나겠지. “그래도 납치는 안 된다”파와 “납치는 잘못이지만, 노비아를 이해한다”파.

 ‘여성 혐오를 단죄해야한다’는 명제는 ‘민주주의가 구현되어야 한다’와 같이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이슈다. 하지만 그 방법과 절차, 우선순위와 정도, 심지어는 개념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많은 목소리들이 산재하며 이러한 현상은 페미니즘 내에서도 벌어진다. 문제는, 이로써 사안의 본질은 흐릿해지고 그것을 둘러싼 보다 익숙하고 덜 불편한 주제에 휩쓸려 결국 말도 안 되는 종착점에 이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흙탕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진흙탕에 코를 박고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뒤로 몇 발자국만 떨어져 그 진흙탕을 관찰해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에, 때로는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가면서까지 쏟아내는 말들 속에서 왜 노비아는 납치를 할 수밖에 없었는가. 여자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가. 남자는 어째서 억울한가 하는 것들을 차분하게 추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선봉에 서있는 매체는 단연 예술이다. 비록 내가 연극 <그녀들의 첫날밤>을 '그녀들의 것 이기에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단순히 그녀들'만'의 첫날밤, 강건너 불구경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혐오가 만연한 시대.
그것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레 이루어집니다.

가정폭력, 채팅방에서의 성희롱,
미성년자들의 윤간 등이 그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혐오는
그것이 역으로 본인에게 가해질 때,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폭력을 당한 사람이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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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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