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타샤의 말

글 입력 2018.02.06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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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말


퇴사한 지 3주가 지났다. 어느 곳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의 대가는 정처없이 떠돌아도 당당한 신분을 선물해 주는 대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과 염려로 대체되었고, 두 감정은 N극 S극 자석처럼 나를 쉴 새없이 자극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인위적으로 가다듬는 대신 혼자 있는 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평소라면 업무와 관련되거나 여행 서적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 했겠지만, 요즈음 내가 꺼내서 읽은 책은 모두 동화책이다. 아무런 근심 없이 살고 싶어서 일까? 모든 동화 속 결말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일까? 아니면 주인공들처럼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서 일까?

평소 ‘바쁜 일만 지나가면 읽어야지.’ 라며 책장 구석 한 켠에 놓아 두었던 <타샤의 말>을 꺼내 들었다. 많은 이들은 그녀를 동화작가이자 삽화가로 전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명예롭고 화려하게 살았을 인물이라 생각하기 쉽다. 수려하고 거창한 수식어와 달리 그녀의 삶은 자연친화적이고 어느 누구보다 세상을 따스하고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작가였다.


원서 제목이 The Private World of Tasha Tudor인 <타샤의 말>은 그녀가 사계절을 지내며 겪는 일상을 담아 두었다. 그저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흐르는 대로 넌지시 건네는 그녀의 말은 산처럼, 강처럼, 시냇물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봐야 함을 조곤조곤 얘기해 주는 그녀의 나지막한 속삭임 같았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그녀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살고 싶어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외진 농가에서 정원을 가꾸고 애완동물들을 보살피고 마당에서 가축을 키우고, 동화책의 삽화를 그리며 말이다.

결말만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한 성공한 삶이다. 18세기 농가를 재현한 그녀의 정원은 보기는 좋지만, 운영하기란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혹자는 그녀를 이상하고 고집 센 작가이자 가드너라고 생각하기도 쉽겠지만,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꼿꼿하게 자신의 철학과 이상대로 인생을 산 그녀의 당참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그리고 ‘제 아무리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내 인생 대신 살아주는 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준 그녀의 이야기에서 인상 깊었던 글귀를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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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독을 만끽한다. 이기적일지는 모르지만, 그게 뭐 어때서, 오스카 와일드의 말마따나 인생이란 워낙 중요한 것이니 심각하게 맘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자녀가 넓은 세상을 찾아 떠나고 싶어할 때 낙담하는 어머니들을 보면 딱하다. 상실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어떤 신나는 일을 할 수 있는지 둘러보기를, 인생은 보람을 느낄 일을 다 할 수 없을 만큼 짧다. 그러니 홀로 지내는 것마저도 얼마나 큰 특권인가, 오염에 물들고 무시무시한 일들이 터지긴 하지만,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해마다 별이 한 번만 뜬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생각이 나는지, 세상은 얼마나 근사한가! - 64페이지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내가 배운 경험 중 가장 본질은 ‘협업’과 ‘소통’이었다. 나와 다른 가치관과 성격을 가진 타인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매일매일이 부딪히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내가 배려하고 인내하고 가끔은 이해하지 못한 일들의 물음표를 던지며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바라보는게 힘들었다.

퇴사 후 내가 만끽하는 가장 즐거운 잉여로움은 바로 ‘고독’이다. 아무런 소음과 방해물이 없는 공간에서 홀로 지내기. 가끔 부모님의 잔소리가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타샤 튜더가 우리 엄마의 속마음(정말 속마음이었으면…)을 얘기해 주는 게 아닐까 위로 삼았다.


한여름은 ‘베리’(딸기류)가 한창인 계절이다. 라스베리(나무딸기), 블루베리(월귤나무), 심블베리(나무딸기류). 하나같이 아주 검고 반들거린다. 맛 본 적이 있는지? 최고의 잼을 만들기에 딱 좋은 과실이다. 하지만 최고는 역시 스트로베리(딸기)다. 갓 딴 딸기같이 맛 좋은 것은 없다, 나는 가장 섬세한 종류들을 골라서 키우려고 애쓴다. 그것들을 맛보면 과연 ‘신들의 음식’이라 부를 만한 터다. 특히 햇살을 받아 아직 따뜻할 때 따먹는 딸기 맛이란…… 내가 신선한 염소젖 크림으로 만든 딸기 아이스크림을 맛보면 좋을 텐데! - 71페이지


그녀가 자급자족하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대리 만족’이란 단어가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간다. 사실 일반적으로 자기만의 정원을 갖고, 동물과 친구가 되기 란 쉽지 않다. 나 또한 고향이 대관령이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특히나 도심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녀의 글과 사진과 그림에서 ‘참 행복’을 대신 읽어가는 기분 이랄까? 그녀가 만든 달짝지근한 스트로베리 잼 맛이 머리 속으로 절로 그려지는 순간이다.


예닐곱 살 때던가 난 놀라운 것을 알아냈다. 인형들에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문득 터득한 것이다. 머릿속으로 아무 생각이나 다 할 수 있었다. 내게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은밀히 원하는 것을 하면서도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막내라서 늘 혼자 지내야 되는 아이였다. 하기야 누구나 달랑 자기 마음만 있는 외톨이들인 것을. - 77페이지


사실 나도 상상력 하나는 타샤 못지않은 유년 시절을 보낸 탓에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주위에서 걱정을 했다. 나 또한 그녀처럼 인형의 재발견을 경험했는데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지금도 혼잣말을 자주 하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과거는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특히 여자들이 힘들었다. 대가족인 데다 임신 중이거나 수유를 했고 뜨개질, 바느질, 음식 준비에 땔감 줍는 일까지 도맡았다. ‘남정네들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일하지만, 아낙들 일은 끝이 없다’란 말도 있잖은가. 옛 아낙들이 불행했단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고단했을 것이다. 나도 새댁 시절엔 힘들었다. 막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전기도 안 들어오고, 물통을 메고 물을 길어왔다. 인두를 데워 다림질했고, 하지만 달리 사는 법을 몰랐기에. 그리 힘들 일로 보이지는 않았다. - 123페이지

 
지난 주 5일간 필리핀 팔라완 취재를 다녀오고, 틈을 내서 남자친구 댁 부모님께 인사를 다녀왔다. (이 글은 인사 후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쓰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예비 새며느리 인사라고 할 자리였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당연히 남자친구는 내가 서투르다 말했고 (달리 변명도 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나는 노력하겠다고 답하였다. 타샤 튜더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내 결혼 생활은 낭만적일까? 낭만적이지 않을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은 바보 같을 수 있겠지만, 낭만을 바라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카누에는 묘하게 원시적인 구석이 있다. 아비(물새의 일종 :옮긴이)가 노래 부르는 소리 같다고 할까. 아주 오래 전, 내 전생의 뭔가를 살살 흔드는 느낌. - 129페이지


내 인생에 카누를 탄 건 강원 삼척에서, 그리고 이번 필리핀 팔라완 고작 두 번이다. 삼척은 카누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사이즈라 처음이라 말하기 애매하지만, 취재로 가 기사를 써야 했기에 체험한 카누는 정말이지 뭐랄까….. 너무 신나서 매일매일 타고 싶을 정도였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틈틈이 자유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나는 카누를 몰고 나가 혼자 바다 구경을 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바다 오이라 부르는 SEA CUCUBER를 발견하고, 숙소 사이사이 얕은 물가까지 카누를 몰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경을 했다. 마치 내 전생이 카누 맨이었나 싶을 정도로, 온 정신이 카누에 팔렸었기에 그녀가 쓴 글귀에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림질, 세탁, 설거지, 요리 같은 집안일을 하는 게 좋다. 직업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늘 가정주부라 적는다. 찬탄할 만한 직업은 아닌데 왜들 유감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가정주부라서 무식한 게 아닌데.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을. - 142페이지

 
내 나이 또래 여성들이라면 ‘가정주부’에 대한 여러가지 모순된 현실과 직업관의 차이에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맞닥뜨려야 할 가정주부라는 직업이 지금의 내 일상과 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 의문반질문반이다. 그녀만큼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하여도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바랄 나위 없이 삶이 만족스럽다. 개들, 염소들, 새들과 여기 사는 것 말고는 바르는 게 없다.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해줄 이야기는 없다. 철학이 있다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자신 있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상상해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라면,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만날 것이다.’ 그게 내 신조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내 삶 전체가 바로 그런 것을. - 174페이지

 
이 책의 저자 타사 튜더는 2008년, 92세의 나이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삶을 마무리 지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남긴 말은 바로, 자신 있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상상해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라는 말이었다.

 
세상에 안주하고, 주위의 눈치가 신경 쓰여 혹은 두려움과 도전에 대한 실패로 시도조차 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타샤의 말>을 조심스럽게 당신에게 건네 주고 싶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여기 당신에게 조금의 위안이 되어 줄 타샤 할머니가 있다고. 할머니가 해주는 옛이야기에 아주 잠시만 귀를 기울여 보자고 말이다.


[오윤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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