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02. 그래도 충분한 선물

글 입력 2018.02.05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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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그래도 충분한 선물



[쓰다] 
- 어떤 일에 마음이나 관심을 기울이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지난달의 일이다. 1월 8일. 내 생일이었다. 생일이란 것은 참 묘한 날이다. 엄마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첫 출산을 했던 날이기도 하고, 어쩌면 아빠가 살면서 제일 안절부절했던 날일 수 있다. 금연 중이었다는데 담배를 급히 입에 물고 피웠다고 하니 말 다했다. 그리고 굳이 미역국을 먹는다. 산모에게나 축하 받을 아이에게나 더 맛있고 건강한 음식들이 많은데도. 무튼 생일이 이상하다고 할 수 있는 다른 이유를 대자면, 잔뜩 ‘기를 세우는 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친구 관계 사이에서 말이다. 내가 작년에 누구누구에게 어떤 축하를 해줬고 선물을 줬고 그게 얼마나 값어치가 있던 것이었는지를 계산하다 보면 인간의 진실함과 인간성에 대해서 순식간에 회의감을 품는다. 내 옹졸함의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씁쓸하다. 이토록 간사하단게.

  당연히 진심으로 축하하고, 그 사람의 하루가 즐거웠으면 하는 의미에서 선물을 하는 것도 있겠지만 과연 ‘내가 누군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을 생각지 못한 채로 무조건 누군가를 좋아하고 행복을 바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할까? 만족스럽지 않은 답례를 받고도 행복할 수 있을까?

‘그 애는 내 생일을 기억할까?’
‘내게 어떤 선물을 줄까?’

  연인과의 관계도 뭐가 크게 다를까 싶다. ‘주고받는 관계’의 가장 고난도 단계가 아닌가. 게다가 생일선물이라니! 작년에 나는 연인에게 체크 셔츠를 선물해줬다. 새 옷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첫 생일선물로는 ‘옷’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그는 셔츠가 마음에 들었는지 4계절 내내 잘도 입고 다닌다. 다른 예쁜 걸 하나 더 사줄 걸 그랬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드디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나의 생일’. 사실 나는 물욕(?)이 다방면으로 뻗어있는 동시에 싫증을 내는 것도 심한 편이라, 아마 1월 달이 다가올수록 선물을 준비해야만 하는 연인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화장품을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금방 관심 없어하고 귀걸이에 눈빛을 빛내다가 또 어느 순간 보면 책 더미 사이에 있을 때 제일 행복해 보이니까. 물론 나 역시 사실대로 말하면 그에게 ‘마음에 쏙 드는 무언가’를 받고 싶었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랐다. (티를 낼 수 없었달까. 갖고 싶은 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채 그냥 마냥 로맨틱함을 느끼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마침내 1월 8일을 알리는 자정이 되자마자 나는 연인에게서 그의 취향과 안목이 물씬 느껴지는 심플한 종이가방을 받았다. 두근두근. 선물인 것이다. 종이가방 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내가 노래를 불렀던 체크 목도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도톰하고 귀여운 네이비색 목도리였고. 그리고 엄청나게 두꺼운 검정 장갑과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구가 적힌 예쁜 엽서, 편지들이었다. 당연히 다정하고 사려 깊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글에서 눈물도 찔끔 흘렸고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그 자체로도 충분하고 만족스러웠다. 1월, 계절 중에서 가장 춥다는 계절을 가르고 태어난 인간을 위해 ‘사랑한다’는 이유로 따뜻한 목도리와 장갑을 선물하면서 축복을 해주는 게 새삼 아름다웠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장갑 말이다. 내 손보다 컸는데, 조금 감안하고 쓰기에도 한참은 큰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너가 한번 써봐’하고 애인에게 건넸더니 정말로 마치 자기 것 마냥 그에게 꼭 맞는 것이다. 둘 다 민망한 순간이 아닌가. ‘아니야, 아니야’ 하며 어떻게든 내 손에 눌러 씌워보지만 손가락과 장갑이 따로 놀 뿐만 아니라, 코트 밖으로 비집고 나오는 장갑이 너무 커서 거인 손 혹은 수영 오리발 같았다. 순간적으로 ‘아니, 어떻게 내 손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지?’ 라고 억울하고 불편한 소리가 튀어나올 뻔 했지만, 망연자실 풀이 죽어 있는 애인의 모습을 보니 안쓰러워 마음을 바로 주워 담았다. 수족냉증이 심각해서 추운 날이면 손이 얼어 아파하는 날 위해 고른 건데. 이미 주문한지 꽤 된 제품이라 반품도 불가능했다. 

  정말로 ‘장갑’만큼은 마음만 받았다. 행복한 포옹 후에 밀려오는 씁쓸하고 아쉬운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서 ‘걱정과 기대에 차 선물한 당사자’인 그만큼 당황스럽고 씁쓸했을까. 그래서 생일 당사자의 권한(?)를 이용해 그에게 다시 그 장감을 선물했다. 열심히 고심하고 많이 혼란스러워했을 대가로 주는 선물인 것이다. (다시는 이런 실수 따윈 하지 말라는 뼈있는 의미이기도 했고) 처음엔 부득부득 거절했으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게 받더니 방 한 귀퉁이에 던져놓는 것이다. 그렇게 웃지 못 할 에피소드는 끝이 난 것 같았다. 정말로 그가 장갑을 쓰게 될까도 의심스러웠고. 겨울 내내 그 위로 먼지나 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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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원동 그날 )


  어느 날이다. 북극한파가 절정에 달하면서 밖에서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든 날씨가 이어지자 결국 연인은 그 장갑을 꺼내들었다. 이를 테면, 양손에 그것을 착용하고 함께 걸을 때 내 손을 쥐어주는 용도로 쓰거나, 혹은 귀가 추워 아프다고 호들갑을 떠는 내 뒤로 붙어 장갑을 낀 손으로 양쪽 귀에 갔다 대는 것이다. 얼어버린 귀를 포근하게 덮어주는 거. 기차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망원동 골목에서 칙칙폭폭 서로의 뒤를 밟는 모양이 우스워 그에게 ‘이러려고 샀나보지?’, 라고 짐짓 핀잔도 주고 놀려댔다. 이 장갑의 숨겨진 매력(?)인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꼭 그렇게 해야만 했다. 굳이 꼭 붙어서 불편한 자세로 손을 잡고 우스운 모습으로 상대의 귀를 보호해줬다. 그리고 수시로 키득거렸다.

  그가 내 손 사이즈를 정확히 알아서 실수하지 않았더라도 겨울 내내 좋았겠지만, 눈 내리는 망원동을 걸으며, 뒤뚱뒤뚱 기차놀이 걸음으로 다 큰 성인 남녀가 귀를 붙잡고 걷는 게 아마 내겐 더 행복한 일인 것 같다. 내가 태어난 1월 정말 재미있는 계절이구나, 라고 처음으로 생각했으니까. 삭막하기 그지없고 추워서 몸만 잔뜩 움츠러드는 겨울이었는데.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젠 더 이상 내 것도 아닌 그의 장갑을 내가 꽤나 귀여워한다는 것을 말이다. 장갑을 끼진 않았지만, 장갑을 어쨌든 쓰긴 썼다고 할 수 있겠지. 선물은 결국엔 날 더 크게 웃게 만들었다. 어쩌다, 푹, 마음에 들게 된 셈이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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