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독재 체제가 남긴 강렬하고 보편적인 상흔 [영화]

영화 < 액트 오브 킬링 >, < 침묵의 시선 >, < 송곳니 >
글 입력 2018.01.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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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소설이 재밌는 이유는 결국 가해자가 잡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완전범죄처럼 보이는 사건이라도 이를 간파하는 탐정의 명추리로 해결되기 마련이다. 사소한 디테일에서 발견된 증거는 가해자의 입을 닫고 처벌받도록 발길을 재촉한다. 그렇게 하나의 케이스가 개운하게 끝난다. 마찬가지로 현실이 슬픈 이유는 범인이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증만 있거나, 심지어는 물증이 있어도, 가해자는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오히려 피해자는 숨죽이며 살곤 한다. 설사 잡혀서 벌을 받아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때도 있다. 에게,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건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얼핏 정보를 듣고 내 일도 아니니 그런가보다 하는 순응하거나 방관하는 이들, 혹은 계속 찜찜하게 의심하는 자들. 이 모든 범주의 사람들은 결국 장기판의 말, 기계로 치면 부품에 불과하다. 가해자의 생각보다 평온한 말로를 보면서 생각한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무슨 대단한 '빽'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세상이 흘러가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바로 시스템이다. 형체도 없이 우리를 동여매고 휘감는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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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극단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독재 체제를 영화 <액트 오브 킬링>, <침묵의 시선>, <송곳니>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다뤄보려 한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은 1965-66년 인도네시아 군부독재 체재 하에 공산주의자 척결을 명목으로 이뤄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송곳니>는 송곳니가 빠져야만 집 밖을 벗어날 수 있다며 아이들을 집에 가둬두고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어느 가족의 기묘한 독재체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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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라고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액트 오브 킬링>의 주인공 안와르 콩고처럼 직접 공산주의자들을 수백 명씩 죽인 사람은 잔인한 가해자이며, <침묵의 시선>에서 억울하게 형 람리를 잃은 동생 아디는 안쓰러운 피해자가 분명하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도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한다. 아디는 그들의 미안하다는 그 한 마디를 찾으려 위험천만하게 그들을 만나려 한다. 그걸로 충분한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인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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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볼수록 아디가 엉뚱한 곳에 질문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공산주의자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찾아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 가해자로서 그 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지 말이다. 평온한 듯 보이는 그의 표정에는 한이 서려 있다. 웃을 때마저 슬프다. 형을 가둬둔 외삼촌과 그를 죽인 집행자의 영상도 보고, 마을의 학살 총 책임자도 만나보고, 주 의원도 만나본다. 위로 거슬러가 보지만 그들의 답은 늘 같다.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현이야 다양하다. 그들은 자신은 몰랐다거나, 서구 열강 국가 혹은 군과 정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이미 지나간 일이니 들추지 말자고 한다. 어떤 이는 그의 질문이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며 협박을 한다. 아디는 묻는다. ‘옛날 같았으면 저한테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때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아디와 마주보는 집행자의 눈빛이 차갑게 이글거린다. 이미 세상을 떠난 가해자의 가족은 자신은 상관없는 일이라며 화를 내거나, 불쌍한 노인네가 한 짓이라며 제가 대신 미안하다고 가벼이 사과를 한다. 아디는 그 모든 자리에서 침묵한다. 침묵은 가슴 안에 고통으로 또아리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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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에 가담했던 이 중에는 선생님이 되어 자랑스럽게 그의 아들에게 공산주의자는 죽어 마땅한 족속이라며 가르친다. 아디는 그 말이 거짓말이며 오히려 학살로 1년에 100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한다. 아이는 혼란스러워한다. 운 좋게 죽지 않고 도망친 한 생존자는 그에게 그냥 묻어두라고, 우리가 아니라 신이 그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찾는 것은 벌이나 복수가 아니라 진심과 진실이다. 미치지 않으려고 자신이 죽인 사람의 피를 마셨다는 이와 미쳐서 나무 위에 올라가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들을 만나고 한없이 침잠하는 그의 눈, 말없이 무표정인 그의 입을 보며 질문하고 싶었다. 아디, 왜 그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까요?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아니면 야속하게도 그들이 그렇게 대답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요? 당신 말대로 같은 인도네시아, 같은 마을 사람들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계속 살게 하는 그 무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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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디가 원했던 것을 대리만족하게 해주는 영화가 <액트 오브 킬링>이다. 초반에 공산주의자를 학살한 것을 뿌듯하게 여겼던 집행자 안와르 콩고가 변했다. 자신이 죽였던 사람의 입장을 연기해보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미소를 띄고 살인을 재연하던 초반과 달리 마지막엔 말을 잇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댄다. 그러나 그걸 보는 모습이 꼭 속 시원한 것만은 아니다. 뒤늦게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내뱉지도 못하는 구역질을 하는 그의 모습엔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웃으며 죽인 가해자, 그리고 자신의 손에 피 묻히지 않고 ‘공산주의자’를 몰살하려던 정부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는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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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와르 콩고와 다른 가해자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퍽 우습다. 살인의 동기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팠고, 좋은 옷을 입고 싶어서. 돈을 준다고 해서. 원하던 대로 멋진 옷더미와 한정판 예술품이 가득하지만 그들의 잠자리는 늘 사납고 기억은 지울 수 없다. 제정신엔 사람을 죽이기 어려워 술을 잔뜩 마셨고 죽이고 나서 춤을 추고 음악을 듣고, 마약을 하면서 현실을 회피하기 바빴다. 그런데 그들의 입지를 계속 굳건히 만들어주는 건 국가다. 그들을 살인자이자, 가해자라면서도 민주주의를 수호한 국가적 영웅이란다. 이슬람교에서 살인은 용납할 수 없지만 신도 버린 공산주의자를 죽인 건 예외라면서. 가해자들은 군과 경찰이 할 수 없는, 나쁜 것들마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프레만이다.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자유인(freeman)에서 나온 프레만, 국가는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은 이들에게 미루면 된다. 권력자들은 제도 밖에서 주먹을 쓰라며 이들을 긍정한다. 상생하는 관계다. 그들이 자유인이기에 책임조차 국가는 사뿐히 넘길 수 있다. 이제는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쟁은 사실상 종말을 선포했는데도 인도네시아에서 여전히 공산주의자는 죽어 마땅하다. 어린아이들은 공산주의자의 피를 얼굴에 사정없이 문지르는 충격적인 반공영화로 교육받는다. 가해자들은 자신을 영화 속 인물과 동일시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안심한다. 신문사는 대중이 공산주의를 싫어하도록 조장했다. 눈만 깜빡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판차실라 청년회 같은 불법 무장단체는 계속 입지가 커진다. 이 구조에선 변화할 틈도, 빠져나갈 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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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입장도 있다. 안와르 콩고와 마찬가지로 집행자였던 아디 줄카드리는 그보다 일찍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국가의 권력자들이, 신문사가 조작한대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태반이 소작농, 지식인 등 공산주의와 관련도 없는 일반인이었으니까. 그들의 자손은 공산주의자의 낙인으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취직도, 결혼조차도 할 수 없으니 불공평한 처사라는 것이다. 그래,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다만 그는 악몽에 시달리지도 죄책감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자신을 합리화할 근거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충분한 보상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가 사람도 죽인 것이다. 사과는 자신들이 아닌 국가의 몫이다. 또한 역사는 승자가 규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죽인 자들은 어차피 패배자이고, 자신은 승자의 대열에 속해있으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때로 치밀어 오르는 약한 마음은 고작 단순한 신경 장애일 뿐이다. 다른 곳의 역사를 봐도 마찬가지니 자신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침묵의 시선>의 아디가 찾던 답은 어쩌면 우문일지도 모른다. <액트 오브 킬링>의 아디는 가해자 중에서도 가장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질문자와 답변자의 이름이 같다. 이 모든 것은 국가가 만들어낸 시스템이 문제였다고. 그리고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어딜 가나 하나씩은 있는 문제라고. 따지기 시작하면 누구 하나 벗어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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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디 줄카드리의 답변은 영화 <송곳니>의 요상한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말대로 다른 곳에도 있다. 이 집의 규칙은 심플하다. 바깥세상은 위험하다. 집을 떠날 수 있는 때는 송곳니가 빠질 때. 나가는 안전한 방법을 차를 타고 나가는 것. 운전을 할 수 있는 건 빠진 송곳니가 다시 날 때. 유일하게 집 밖을 드나드는 건 아버지다. 어머니는 몰래 남편과 전화를 하며 아이들을 관리하고, 좀비를 ‘작고 노란 꽃’이라고 알려주는 등 전혀 다른 의미로 아이들에게 세상을 입력시킨다. 다 큰 자녀들은 집 밖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흰 옷만 입고, 자신들이 담긴 비디오만 볼 수 있고, 뜻밖의 가족애를 노래하는 ‘할아버지’의 명곡 < fly me to the moon >을 들으며 춤을 춘다. 그들의 하루는 마취제를 마시고 누가 일찍 깨는지, 누가 잠수를 더 오래하는지 같은 게임과 그에 따른 포상으로 채워진다. 실소가 터지기도 하지만 실은 무섭다. 이 집 역시 어느 독재체재의 표상인 것이다. 공공의 적을 설정하고, 언어와 대중매체, 정보를 통제하고, 국민들을 향락으로 이끄는 면이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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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집에서 작고 귀여운 고양이는 아이들의 살을 뜯어먹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이다. 벌써 아들 하나는 송곳니가 빠지지도 않았는데 집을 나간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 아이가 무서운 고양이의 습격에 당해 죽은 것으로 포장한다. 그는 계속 훈련학교에 맡긴 개를 데려오려 한다. 개가 있으면 누가 집을 나가도 금방 눈치를 챌 테니까. 훈련사는 개가 찰흙 같다고 말한다. 개는 싸움꾼이 될 수도, 겁 많고 온순한 동물이 될 수도 있으니 빚어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처럼 명령에 복종하는 그런 개는 길들여질 때까지 갖은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다고. 이상하게 그가 개에 대해서 하는 말이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말 그대로 개처럼 짖고 있는 그의 일가족을 봤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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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아이 한 명이 다시 이 집의 규칙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독재체제가 추구하는 통제의 가장 큰 천적이 바로 의심이다. 지난 번 탈출한 아들은 아직 ‘준비되지 않는 상태’였다는 걸 보니 송곳니를 빼지 않았던 모양이다. 반면 그녀는 의심하면서도 규칙을 지키는 탈출을 감행한다. 송곳니를 아령으로 깨부수고 안전하게 차의 트렁크로 숨었다. 잠시 이 집의 규칙을 되새겨보자. 거짓말이다. 이미 성년이 된 아이들이 송곳니가 자연스럽게 흔들려 빠지고 다시 날 일은 없다. 송곳니는 치아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깊고 단단하며 전반적인 균형을 지탱하는 치아다. 그 규칙은 아이들이 바깥세상으로 나갈 일도, 이 체제를 벗어날 일도 없다는 반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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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남은 아이들은 여전히 바깥세상에서 험한 꼴을 당한 자신의 형제자매를 안타까워할 뿐이다. 남은 건 트렁크에 탄 딸의 선택이다. 처음엔 그녀의 탈출이 실패했다고 단정지었다. 그녀 역시 오랜 시간 그 집의 시스템에 길들여져 결국 다시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돌아가겠거니 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트렁크에는 안에서 열 수 있는 비상개폐 장치가 있지. 이미 아버지가 안전하게 차를 몰고 자리를 비운 상태. 트렁크의 문을 언제 열지에 대한 규칙 같은 건 없었다. 이름이 없던 그녀는 브루스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남은 선택 또한 그녀의 몫이다. 트렁크를 열고 위험한 바깥세상으로 나갈지, 아니면 이 ‘안전한’ 세상에 계속 남아있을지.

 피해자와 가해자가 강렬한 소수라면, 그녀처럼 의심과 순응, 움직이는 것과 그대로 있는 것 사이에 고민하는 경우가 다수일 것이다. 시스템은 이럴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길들여뒀다는 확신이 있거나 혹은 남은 자들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서. 가해자와 피해자, 순응하는 자와 의심하는 자. 어떤 입장에 속해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재 체제에서 사람들은 결국 체제가 남긴 강렬하고 보편적인 상흔을 안고 버려진다. 다른 것 같지만 같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도, 딱지가 앉은 것 같지만 곪아 있는 것도. 왜 골치 아프게 들춰내냐 묻는다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다고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니까. 계속 드러내지 못하고 고통을 견디고 있으니까. 그렇게 한 사람이, 한 가족이, 한 마을이, 한 국가가, 전 세계 곳곳이. 한 시대가 끝나고 관련된 모든 이가 생을 마감한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르고 태어난 이후의 사람들에게도 명예로운 병폐처럼, 손대기 싫은 숙제처럼 이어져 오니까. 당사자인 시스템은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침묵할 뿐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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