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5도살장’ : 아이러니를 위한, 아이러니에 의한 [문학]

글 입력 2018.01.2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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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다. 반전소설로 알려진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이다.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은 책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 문구를 처음 봤을 때, 굉장히 고무적인 기도라고 생각했다.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 의지를 가지고 시도하는 자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을 의연하게 인정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종종 생각해 보았지만, 가장 중요함에도 보지 못했던 것은 그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였기 때문이다. 본받을 만한 마음가짐이었기에 어떤 맥락에서 이 기도문이 쓰였는지 궁금해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해당 페이지를 봤을 때 기도문의 아래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


“빌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었다.”


-

 빌리는 ‘제5도살장’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초반부터 등장하지는 않고, ‘제5도살장’의 도입부는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기자로 일했으며, 지금은 자신이 겪었던 드레스덴 공습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수집을 하고 있는 ‘욘 욘슨’이다. 작가인 커트 보니것이 드레스덴 공습을 겪었다는 사실 때문에, 여기까지는 욘슨의 입을 빌려 자신의 집필 과정을 말하는 듯한 자전적인 느낌이 든다. 그는 글을 구상하며 전쟁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에게 함께 포로로 잡혔던 ‘빌리’라는 미국인에 대해 묻기도 하고, 글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한 미국인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빌리의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빌리가 완전히 가상의 인물인지, 욘 욘슨과 함께 포로로 잡혔던 인물에 기반하여 창조된 인물인지, 실재하는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빌리가 겪은 일은 어떤 시간적 논리적 순서도 따르지 않고 무질서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트랄파마도어라는 미지의 공간으로 잡혀 가기도 하는데, 거기서 트랄파마도어인들이 만들어 놓은 동물원에 갇혀 생활한다. 사실 그곳으로 가기 전에도 빌리는 평범한 삶을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2장은 그 기원으로부터 시작한다.


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빌리는 노망이 든 홀아비로 잠이 들었다가 결혼식 날 깨어났다. 1955년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니 1963년의 자신이 나왔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빌리의 생애가 전개되는 와중에 그는 시간여행을 하며 중간 중간 전시로 돌아간다. 그 때마다 전쟁 포로로서 겪었던 일들과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이 묘사된다. 한 미국인은 영웅심에 도취해 삶의 의욕이 없는 빌리를 구출하려다가 포로로 잡혀 사망하고, 다른 미국인은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빌리에게 물으며 살해를 예고한다. 독일인들은 비쩍 마르고 하늘색 토가를 걸친 괴이한 차림의 빌리보다 그 옆의 말이 혹사당한다는 사실에 더욱 마음 아파한다. 빌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이런 식이다. 아이러니하고 일치되는 부분이 없으며 그로테스크하다. 그러나 빌리는 어떤 것에도 억울해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책 전체에 걸쳐 총 106번이나 등장하는 "뭐 그런거지" 라는 표현은 세상 만사에 대한 빌리의 무기력한 반응을 반영하는 듯 하다.

 빌리의 태도는 시간여행자라는 독특한 설정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빌리는 시간 여행을 통해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트랄파마도어에 감금되면서 더욱 심화되는데, 빌리가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과거에 잘 살아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만사에 무반응적인 것이다. 영웅심에 도취된 미국인이 돌기 달린 칼로 자신을 위협할 때에도, 그가 다른 정찰병들에게 버려져 절망할 때에도, 독일인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에도, 자신이 비행기 사고를 당할 때에도, 그 여파로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에도, 드레스덴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을 때에도, 폐허가 된 그 도시에서 포로 생활을 함께 했던 동료 미국인이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총살당했을 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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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빌리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현실이다. 빌리에게는 모든 순간들이 영원하고 (무작위일지라도) 돌아갈 수 있는 것일 지 몰라도, 사람들은 인생이 단 한 번뿐이기 때문에 전쟁 속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살고자 한다. 여기서 생존에 대한 사람들의 지독한 간절함과 빌리의 초월적인 시간 인식은 극명하게 대비되지만, 작품에서 부각되는 것은 사람들의 노력이 아니라 빌리의 무기력한 태도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작가인 욘 욘슨의 입을 빌려 클라이막스로 정해진 부분은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무력한, 가장 살아남을 가능성이 적었던 빌리가 결국 살아남아,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가장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던 에드거 더비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작품해설 中)을 목격하는 것이다.

 해설에서는 빌리의 정신이 이러한 아이러니로 인해 무너졌다고 한다. 나는 그의 평범하지 않은 시간 인식이나 무기력이 단순한 정신 장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딛고 생존한 그가 마지막까지 함께 살아 남았던 에드거 더비의 허무한 죽음에 마침내 무너졌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자신의 생존이 그 자체로 아이러니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 연인과 친구가 있어본 적 없는 빌리가, 그들에 대해 노래하는 <광산의 그 늙은 패거리>를 듣고 울컥하지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장면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인간이지만 인간적인 것을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린 순례자, 빌리 필그림의 존재는 아이러니의 파급력을 작품 밖까지 이끌어 내는 중요한 열쇠인 것이다.

 ‘제5도살장’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은 내가 빌리의 시선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아무 것에도 변명하지도, 노력하지도 않는 빌리의 무력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러니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 전쟁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빌리라는 아이러니한 존재는 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일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때때로 보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행동인 전쟁과 학살을 빌리의 시선을 통해 무덤덤하게 그려냄으로써 발생된 아이러니는 마땅한 슬픔을 여러 번에 걸쳐 곱씹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여운은 한동안 가시지 않을 것 같다.


[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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