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모두 사냥꾼이었다 : 더 헌트 [영화]

글 입력 2018.01.25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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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순수함의 상징이다.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보면 어느 누구도 이들이 거짓말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아이들이 가끔 지나치게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내뱉는 솔직한 말들이 순수함에서 나온 귀여운 진실이라 생각하며 그저 웃어 넘긴다. 그만큼 우리는 아이들이 가진 순수성과 진실성을 믿는다. 그리고 이 영화 속 유치원 원장처럼 외친다. "나는 아이들을 믿어요. 그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요."라고.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진실을 말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영화 '더 헌트'는 이러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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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t'


 영화 속 주인공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로, 평범한 삶을 산다. 평범함보다는 조금 더 유쾌한 삶이랄까. 그는 친구들과 아이처럼 발가벗고 수영을 하기도, 합심하여 사냥을 하기도 한다. 아내와 이혼 후 양육권의 문제로 힘들어하지만, 유치원에서 근무하는 동료와 교제하며 그의 생활은 안정되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절친한 친구 '테오'의 딸이자 유치원생인 '클라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뀐다. 유치원에 다니면서 루카스와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진 클라라는 그에게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한 그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이에 상처를 받은 그녀는 그에게 성 학대를 당했다는 식의 거짓말을 하게 되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려버린다.

 누명을 쓴 루카스를 지켜보는 내내 우리의 마음은 답답하다. 거짓이 진실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멀쩡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은 관객뿐이기 때문이다. 뭐에 홀린 듯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정된 인식을 유지하기 위해 클라라가 진실을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클라라의 엄마 아그네스는 클라라가 진실을 말해도 끔찍한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지우려는 행동이라며 고정된 자신의 편견을 주입하고, 유치원 원장은 이미 루카스가 범죄자임을 기정사실로 하여 학부모들 사이에 편견을 조장한다. 그들은 자신이 쌓아 올린 편견이 진실이라 믿으며 루카스를 사냥한다. 마치 중세시대에 마녀가 있다고 철저히 믿은 사람들이 마녀처럼 보이는 이들을 모조리 죽인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제목 'The Hunt'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루카스는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 '사냥'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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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자는 이 사태의 최대 가해자가 클라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맞다. 클라라의 거짓말 때문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상 영화 속 모두가 가해자이다. 한순간의 오해와 편견으로 루카스의 인생이 추락해버렸지만 '사실'을 확인해보려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한 차례의 변명도 못 하고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편견에 희생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 과정에서 루카스는 저 멀리 떨어진 사냥감처럼 오해와 편견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저히 배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우리는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그를 매도한 마을 사람들을 원망한다. 하지만 우리라고 다를까? 내가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더라도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편견이 곧 사실인 양 그를 함께 사냥했을 것이다. 사실보다 중요한 편견 속, 우리는 모두 사냥꾼이 된다.



마녀사냥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다


 결국, 루카스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하지만 이미 편견 속에 이미지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는 불특정인의 끊임없는 괴롭힘으로 피폐해진다. 상황을 침묵과 소심한 항변으로 저항했던 루카스는 이 기점으로 폭발한다. 모두가 행복한, 그리고 모두가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크리스마스에 그는 눈빛만으로 자신의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다는 테오에게 강력하지만 애절한, 결백의 눈빛을 보낸다. 그 순간,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두 인물의 감정은 폭발한다. 이 영화의 가장 명장면인 이 부분은 그를, 또는 현실에서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함께' 사냥했던 관객들의 감정도 폭발하게 만든다. 이 순간 우리는 마녀사냥의 피해자, 가해자 신분으로 마주보게 된다. 비록 루카스의 폭발로 테오는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지만 그의 결백한 눈빛, 클라라의 죄책감 어린 고백으로 오해를 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감정을 내려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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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마지막에는 오해가 풀리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루카스도 일상으로 돌아오는 듯하다. 그러나 한 번 어긋난 관계는 예전과 같지 않다. 이미 약자로 인식된 사냥감은 언제나 긴장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사냥터에서 루카스는 자신과 같은, 한낱 사냥감이었던 사슴을 바라본다. 그 순간 그의 옆으로 총알이 빗나간다. 그가 무죄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웃의 불만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총을 쐈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항상 피해자는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마녀사냥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다. 다음에는 빗나가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 영화는 크리스마스에 서로의 감정을 내려놓으며 이 사태가 끝난 것처럼 포장했지만 루카스를 빗나간 총알을 통해 아직 피해자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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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단순히 영화 속 판타지가 아니다. 또한, 이것은 비단 루카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사냥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사냥감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러시안룰렛처럼. 현대 사회 또한 루머와 가십, 페이크 뉴스로 물들어있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 사회에서 우리는 '아님 말고!'식으로 사냥당하는 사람들을 방관하고 있다. 어쩌면 주도적으로 사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 또한 사냥감이 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당신은 사냥꾼이 되겠지만 사냥감으로 전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마녀사냥이 활발했던 중세시대보다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 사회도, 아직 마녀사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또 하나의 특정 시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모두가 총을 내려놓아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 총의 총알이 누군가에게 박히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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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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