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가 있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1.2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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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에서 깨어나 찍었던 사진. 바깥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창문에 걸터앉아 지는 노을을 보던 날이 있었다. 흔들거리는 맨발과, 초여름의 바람과, 적적한 고요함이 노래처럼 들리던 날이었다. 그때 나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없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목적 없는 서러움을 풀어내고 있었다. 조금만 앞으로 기울이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위험은 신경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 돌아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 이제는 어림짐작만 가능하다. 짐작컨대 예민한 감수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게는 그 시기가 양날의 검이었다. 지금의 나를 형성한 수많은 수분과 체액과 허무와 철학은 그 시기를 양분삼아 만들어졌다. 그 시기의 나는 잘 웃었고, 잘 분노했고, 잘 허무했으며 동시에 언제나 불안했고, 초조했으며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만큼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그 시기의 내가 딱 그랬다.
   
 한번은 할머니에게 유서를 들킨 적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책상 서랍에 항상 있던 유서가 없어져 있었다. 슬그머니 거실에 나갔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마늘을 빻고 있었다.
 
 “할머니.”
  
 느지막한 목소리로 할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할머니가 유서를 가지고 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후에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할머니는 나를 따로 불러내거나, 내게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와 같았다. 얼마 뒤에 학교에서는 대대적으로 심리검사를 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교내 방송으로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교무실에 가니 나를 포함해 2명 정도가 더 있었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양호실로 내려갔다. 지금도 나는 우리가 왜 손을 잡고 내려가야 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우리는 양호실에 가서 간단한 상담을 받고 교실로 돌아갔다. 물론 돌아갈 때는 따로따로였다.
 
 그날 밤에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나를 불렀다. 엄마는 방에 앉아 내게 힘든 일이 있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학교에서 전화를 받았노라고, 내가 위험한 수준의 우울증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언제든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했다. 나는 느적느적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나오면서 거실에 앉아있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씩, 웃어주는 것으로 나는 할머니에게 전하지 않았던 말을 전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가 있다. 당시의 나는 롤러코스터를 탄 아이와 같아서 하루는 괜찮았다가 하루는 괜찮지 않았고, 하루는 힘들었다가 하루는 버틸만하다고 느꼈다. 진심으로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딱히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럴 때도 있었던 것 같고, 아닌 것도 같으니까. 누군가 그랬지 않은가.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사진이 빛바래지듯 감정도 빛바래지는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날들의 날씨나 분위기나, 바람은 모두 기억하는데.
 
 우울은 아주 천천히 해소되었다. 물론 모두 해소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밑바닥의 짙은 우울은 남아있다. 그럼에도 찰랑이며 곧 쏟아질 것 같은 우울은 많이 사라졌다. 이제는 제법 받아들이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정답이었던 셈이다.
 
 요즘도 가끔씩 꿈을 꾼다. 창문에 걸터앉아 지는 노을을 보며 우는 내가 보인다. 나는 어린 나의 뒤에 앉아 가만히 등을 보고는 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등을 볼 수 없다던데. 어쩌면 나는 예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초침소리를 들으면서 등을 보다보면 어느 순간 잠에서 깬다. 그럼 필시 여명(黎明)의 시간이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가 있듯, 괜찮아도 괜찮지 않은 하루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이 반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을, 혹은 지쳐 외로웠을 당신을 위해 글을 보낸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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