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면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 - 오셀로와 이아고

글 입력 2018.01.23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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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지만 탈춤이란 건 내게 그리 친숙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서양의 고전 오셀로와 한국의 전통 극 형식 탈춤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은 정말 우스운 것이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극 속으로 미친듯이 빠져있었다. 오셀로와 이아고는 탈춤이 지닌 연극적인 효과를 본연의 스토리와 놀랍도록 예리하게 조화시켰다. 이아고가 핵심 인물로 등장해, 인간이 얼마나 질투심에 연약하고 사랑 역시 얼마나 가녀리며, 말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비춘다. 인상깊었던 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 플롯을 바탕으로 '탈' 이라는 소재의 아이덴티티를 더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깊이 이끌었다는 것이다.

마음을 숨기는 탈을 써라. 극 내내 이아고가 외치는 한 마디. 하지만 극 중 인물들을 살펴 보면 탈이 모두 마음을 숨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셀로의 붉고 도드라지는 양각의 가면은 군인의 기백과 대담함과 특유의 인상을 솔직할 정도로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이아고의 꾐에 넘어가 데스데모나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득찬 오셀로의 가면은 이전과 다르다. 붉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가 새로 쓴 하얗고 뭉툭한 선의 가면, 그 위로는 표정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얗게 지운 듯 덩그러니 뜬 눈 만 보이는 가면은 어딘지 모르게 이아고의 것과 닮았다. 일반적으로 가면, 탈은 무언가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나 이 극에서 탈은 자기 스스로를 감추는 수단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자신을 무식할 정도로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탈이었다가도, 무섭도록 완벽하게 제 내면의 감정을 숨겨버리는 것이 탈이 된다. 무대 외의 모든 사람들은 얼굴이 있다. 맨 얼굴은 없다. 저마다의 탈을 쓴 얼굴이 있다. 탈을 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한 논지가 아니다. 단 두 가지 명제만 남는다. 우리는 당연히 탈을 썼다. 그렇다면 어떤 탈을 썼는가.

왠지 모르게 부정하고 싶어진다. 탈을 썼다, 가면을 썼다. 이 단순한 표현에서 오는 거부감은 생각보다 직관적이어서, 무의식에 기반해 통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듯 하다. 일반적으로 탈이란 것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필요한 것일진대, 무엇이 그리 숨기고 싶어 우리는 다 탈을 쓰고 있냐는 질문으로 이어져 버리니까. 그래서 불편하다. 내가 알맹이라고 믿고 있던 것은 무엇이고, 나를 구성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과연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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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를 통해 본 탈에 대한 두 가지 명제는 탈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만들면서 탈, 가면의 개념을 재정의하게 된다. 어쩌면 탈은 얼굴을 덮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얼굴이다. 우리는 얼굴을 벗을 수 있을까?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마음은 어쩌면 몸뚱이 속에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마음은 아주 얇은 표피처럼 생겨서,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 이미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성격을 꾸며내든, 어떤 거짓으로 무장하든, 얼굴에 그 마음이 새겨진 시점에서 그건 탈을 쓴 게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자신이다. 스스로를 감추고 가리는 이아고의 하얀 탈은 그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드러낸다. 속을 감추고 무섭게 웃는 입꼬리가 비열한 인상을 전한다. 이아고는 처음에 어떤 모습이었을 지 몰라도 결국 그 탈은 얼굴이 되었다. 극 중 자신의 원래 탈을 벗은 오셀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탈을 벗은 맨 얼굴은 그 스스로를 잃어버린 상황인 듯 느껴진다.

더불어 흥미로웠던 점은 말이라는 요소가 이 극에서는 거짓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표정과 몸짓으로만 극을 진행할 뿐. 하지만 마음을 감추는 탈을 쓴 오셀로로 하여금 말을 내뱉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 자신을 더이상 순수하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이젠 말을 더해야지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 초반에는 오직 이아고만 말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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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몰입도 높은 극은 탄탄한 연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대 위 구성은 간결하다. 조명, 하얀 모래가 채워진 무대, 뒤에 자리한 연주단, 가면과 의상을 걸친 배우들. 간결한 구성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낸다. 특히 음악이 정말 인상깊었다. 동서양의 악기를 고루 사용하고, 고전과 현대의 악기를 고루 사용해 아이러니컬한 음색이 조성되지만 그것이 결코 어색하지 않다. 낯선 음악적 요소의 조화는 무대 위에 극적 긴장감을 풍부하게 불어넣는다. 북, 장구 등 한국 전통 악기를 활용해 둔중한 베이스 멜로디를 잡고, 때로 얇고 날카로운 전자 기타음이 그 위를 스치며 강약과 밸런스를 잡는다. 이 외에도 다양한 악기가 장면 별 적절히 사용되었다. 특히 오셀로의 혼란스런 내면 세계를 비롯해 인물의 극단적인 감정 상태를 풍부하게 표현한 소리꾼의 의침은 마치 내가 그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다음, 이아고는 관객석을 등지고 가만히 섰다. 그는 천천히 제 손을 들어올려 멀건 가면을 벗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 가면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을 텐데. 그의 담담한 등이 머릿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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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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