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탈춤, 동시대 관객과 교감하는 법 ‘오셀로와 이아고’

'마음을 숨기는 탈을 써라! 2017 공연예술 올해의 신작 창작산실 '오셀로와 이아고'!
글 입력 2018.01.1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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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풍요의 시대다. 물질도 정신도 모든 것이 많다 못해 넘쳐서 과잉을 야기할 정도로.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또 그것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정작 본래 안고 가야할 원형들은 점점 잊혀 가는 것만 같다. 공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연극이니 뮤지컬이니 하며 타 문화권에서 들어온 것들이 이제는 우리의 입맛에 맞추어 주류로 되었고, 본래 우리 고유의 공연예술이라 할 수 있는 연희나 탈춤은 많은 이들의 관심사 밖이 된지 오래다. 그렇기에 지금 이 물살에 휩쓸려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금 본래의 우리 전통이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분명 있다. 동시에 본래의 것이라 불리는 것들 또한 오늘의 흐름에 발마추어 걸어 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을 시도해야 한다.
 
여기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의 실험을 한 작품이 있다.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보인 ‘오셀로와 이아고’가 그러하다. ‘오셀로와 이아고’는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한국 고유의 총체예술인 탈춤을 기반으로 셰익스피어의 작인 ‘오셀로’의 이야기를 색다르게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이들은 동시대 관객과 교감하는 방법으로 고전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고전과 탈춤이란 키워드에서 오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소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필자 또한 공연 관람 이전에는 이와 같은 생각을 했었고, 관람하는 내내 동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여 어떤 모습을 선보이는가에 대해 집중했었다. ‘오셀로와 이아고’로부터 깨달은 바는 동시대의 것이란 어쩌면 지나친 추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었다. 나아가 던지고자하는 의미만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와 닿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동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 면에서 ‘오셀로와 이아고’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으로부터, 탈춤의 유려한 몸짓으로부터 인간 감정의 가장 원형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대의 작품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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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셀로와 이아고’가 오늘의 흐름과 물음에 답할 수 있던 것은 ‘창작’의 요소가 담뿍 담겨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셀로와 이아고’는 고성오광대, 하회별신굿탈놀이, 강령탈춤의 이수자들이 탄탄한 재주의 기반을 가지고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움 춤사위를 선보인다. 인물의 행위를 표현함에 있어서 탈춤의 본질을 안고 그 위에 새로운 발견을 적용하고 창작하는 과정을 거듭하여 작품 속 여러 인물의 행동과 감정을 묘사한다. 어딘가 모르게 현대무용 같은 느낌을 풍기는 이들의 몸짓으로부터 달관과 넉살이란 탈춤 정신의 원형을 마주할 수 있다.

흔히 해학이란 키워드가 탈춤을 생각하면 자연히 떠오르겠지만, ‘오셀로와 이아고’는 그보다 한 층위 위에서 달관과 넉살이란 핵심 요소를 끌어낸다. 이것은 ‘오셀로와 이아고’를 비극으로 이끌고 가는 원동력인 질투를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최적의 요소로 작용한다. 작품 속에서 질투, 미움, 의심이란 사랑의 이면을 맛보게 되는 오셀로의 가슴 아픈 분노는 달관으로, 그런 그를 세치혀로 휘둘리게 만드는 이아고의 행동은 넉살이란 탈춤 특유의 원형으로 표현된다. 질투가 가져다주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떻게 사랑을 무너뜨리고 파멸의 길에 이르게 되는지 탈춤의 정신원형을 통해서 표현하는 ‘오셀로와 이아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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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과 고전을 통해 동시대의 관객과 교감하기. ‘오셀로와 이아고’는 어느 정도 그 근본 과제에 대해서 성취를 이룬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 있어서 아쉬운 점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탈춤과 고전의 만남에 있어 한계점일 수도 있고, 무엇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과제일 수도 있다. 필자가 느낀 바는 ‘굳이 셰익스피어의 고전이었어야만 했나?’라는 점이다. 물론 ‘오셀로’의 대화체나,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사랑의 이면을 탈춤을 통해서 잘 표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탈춤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만남까지는 공감이 되었지만, 완전한 합일에 이르렀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셀로’와 소재가 어느 정도 비슷한 우리의 전통 설화인 ‘처용’을 새롭게 해석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고전도 잊고 지내는 마당에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마주하려니 단번에 극의 흐름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고, 과연 탈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달관과 넉살이 타 문화권의 작품을 통해서 온전히 잘 드러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도 쉽게 떨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류의 것을 통해 오늘날 다시 활력을 불어 넣는 일이 오히려 더 큰 교감의 장을 만들어 줄 것만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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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도 탈춤은 ‘총체예술’이다. 무대 위의 탈춤꾼이 춤을 춘다고 해서 그 공연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이를 꾸며주는 음악도 있어야하고, 아기자기한 탈도 있어야하고, 그들의 춤사위와 노랫소리에 호응을 불어 넣는 관중들도 있어야 한다. 즉, 여러 가지 요소가 공존해야 탈춤은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셀로와 이아고’는 탈춤을 통해서 예술을 표현한다지만 총체예술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괴리감이 있다. 탈춤은 주로 마당에서 관객과 무대의 경계가 없이 하나 됨을 추구하지만, ‘오셀로와 이아고’에서는 무대와의 경계가 분명했다.

나아가 무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오로지 탈춤꾼의 의해서 진행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다분했다. 함께 즐기고 호흡한다는 느낌을 쉽게 받지 못했다. 관객은 그저 관객의 역할을, 무대 위의 배우는 제 몫의 연기를, 장막 뒤에 감춰진 음악그룹은 연주의 역할에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너무나도 쉽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언젠가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보면서 ‘이 자리에서 함께 호흡하고 공감하고 있구나!’를 느꼈던 적이 있는데, 이번의 작품에서는 공감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들의 호흡을 따라가고 마주하고 있음만 느낄 수 있었기에 아쉬움이 다소 짙게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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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아쉬움을 내게 안겨다 준 ‘오셀로와 이아고’지만, 이것은 지극히 애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다고 일러두고 싶다. 탈춤과 고전의 만남이란 신선한 도전을 선보인 이들로부터 동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전통이란 무엇이고, 공존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 환기의 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것이 최고라는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나 다른 시대, 다른 문화권의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접하니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탈춤의 매력과, 셰익스피어 작품의 현재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가 탈춤과 고전을 통해 던지는 제언을 통하여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었던 ‘오셀로와 이아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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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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