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이야기] 이야기가 끝나고 아이는 성장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
글 입력 2018.01.0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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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중순,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감기가 심하게 걸려 며칠 동안 정신이 없었다. 아플 때면 늘 느끼는 거지만 통증은 일상을 아주 낯설게 만든다. 해야 할 일, 고민하던 일이 흐릿해지고 생각이 자꾸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특히 오래전에 연락이 끊어진 친구나 예전에 좋아했던 드라마, 가수같이 평소에는 잊고 지내던 과거의 유물들이 불쑥불쑥 느슨해진 생활 속을 파고든다. '이야기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빌렸던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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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더 잘 알려진 곰돌이 푸는 사실 작가 A.A.밀른이 자신의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태의 동화책 속 캐릭터다. 어렸을 때는 이 살아 움직이는 곰인형의 이야기를 길벗어린이에서 퍼낸 <곰돌이 푸우는 아무도 못말려>와 <푸우야 그래도 나는 좋아>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현대지성에서 2013년에 두 권의 책을 합쳐 한 권으로 퍼낸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을 빌렸다.

 기대를 안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잘 읽히지가 않았다. 다시 읽으니 푸와 그 친구들이 벌이는 모험은 너무 단순해서 '모험'이라 부르기도 애매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별로 재미가 없었다. 마치 어렸을 때 놀던 넓은 길이 자라서 아주 좁은 길이었다는 걸 발견한 기분이었다. 분명 책 속의 세상은 변함없이 즐겁고 행복한데 나는 거기에 공감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푸의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페이지 사이를 방황하던 내 시선이 멈춘 곳은 마지막 에피소드 첫 문단이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떠나가 버릴 예정이었어. 아무도 왜 떠나는지 몰랐지.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어. 사실 아무도 크리스토퍼 로빈이 떠날 예정이라는 걸 왜 알고 있는지조차 몰랐지. 하지만 어쨌든 숲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마침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어.

-314쪽
'크리스토퍼 로빈과 푸는 마법에 걸린 장소로 가고,
우리는 거기에서 둘과 헤어진다' 중


 '크리스토퍼 로빈과 푸는 마법에 걸린 장소로 가고, 우리는 거기에서 둘과 헤어진다' 는 제목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크리스토퍼 로빈은 평소와 달리 푸와 그 친구들을 찾는 발길이 뜸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오랜만에 만난 푸와 로빈은 함께 산책을 한다. 로빈은 푸에게 인수분해나 외국, 왕과 여왕의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지만 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푸와 친구들은 계속 인형인 채로 머물러 있지만 로빈은 사람이기에 점점 성장하는 것이다. 바로 전 에피소드에서까지 푸와 어울려 놀며 그 세상에 속해 있던 로빈은 갑자기 나와 같은 이방인이 되었다. 곰돌이 푸 이야기가 재미없어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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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프지만 로빈이나 나의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한 때 세상의 전부였던 것과 서서히 멀어지다 어느새 이방인이 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벌어지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3'의 우디와 앤디,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와 빙봉처럼 당장 떠오르는 이야기만 해도 여러 개다. 우리는 흐르는 시간과 함께 나이를 먹으므로 모든 것을 예전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알은 새의 세계이며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는 '데미안'의 한 구절처럼 수많은 알을 깨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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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소중한 것들도 언젠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나도 나이를 먹고 변할 거라는 사실이 엄청나게 두려웠기 때문에 한때는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동경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일이건 완전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면서 완전하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생각되면 시작하길 꺼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전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가끔 과거가 후회된다. 영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당시의 나에게는 큰 기쁨을 줬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그냥 지나쳐버린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이제는 영원하고 완전한 걸 찾아 헤매는 대신 지금 나에게 소중한 걸 더욱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변할 수 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불완전한 현재를 더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의 주인공인 크리스토퍼 로빈은 곧 부서지려는 자신의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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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지는 푸 못지 않게 떠나는 로빈 역시 자신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알아채고 두려워한다. 알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려는 사람, 성장하는 사람, 어느 한 시절을 지나 다음 시절로 넘어가는 사람이 당연하게 가지는 두려움이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망설임 끝에 로빈은 푸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푸, 만약에 내가...... 만약에 내가 잘......"
크리스토퍼 로빈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어.
"푸,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넌 이해하겠지, 그렇지?"
"뭘 이해하는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크리스토퍼 로빈은 웃음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섰어.
"가자!"
"어디로?"
"어디든지."

-331쪽,
'크리스토퍼 로빈과 푸는 마법에 걸린 장소로 가고,
우리는 거기에서 둘과 헤어진다' 중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둘은 떠난다. 한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러나 서술자는 그 모습을 슬프게만 그리지 않는다. 대신 로빈과 푸가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겪든 둘이 한때 함께였던 장소에는 조그만 남자아이와 곰인형이 장난을 치고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알을 깨고 나온 뒤 남겨진 알껍데기는 추억이 되어 과거에 머문다. 돌아보면 그 추억은 어쩐지 서글프기도 하고 이런 게 한때 내 세상이었다니 하는 생각에 우습기도 하다. 무엇보다 과거에 그만큼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음에 감사하다.

  푸의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 로빈과 나는 또 다른 알을 깨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의 끝을 볼 것이다. 계속 한 이야기에만 머물 수는 없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언젠가 깨진 알껍데기가 된다 해도
지금 나의 세상을 힘껏 사랑할 것.
그리고 이야기의 끝이 다가온다면
아쉽지만 미소를 지으며 다음으로 넘어갈 것.

 이야기 속에 남겨진 푸가 건네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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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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