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황홀한 색채로부터 내면에 이르는 길, '마리 로랑생'展

색채의 황홀 : 마리 로랑생 展을 가다!
글 입력 2017.12.3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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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황홀한 색채로부터 내면에 이르는 길
마리 로랑생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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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황홀 : 마리 로랑생 展

2017년 12월 9일 - 2018년 3월 11일 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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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일생을 한 단어로 특징지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술가의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한 시기에는 지독히도 외로웠다가, 또 어느 한 시기에는 미친 듯이 예술 혼을 불태우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쳐나간다. 이는 예술가 역시 결국에는 인간이란 본질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삶의 굴곡을 따라서 세상과 소통했다가, 지극히 내면에 이르기를 반복하는 예술가의 삶. 이것이야 말로 예술가로서 삶과 체화된 예술을 펼쳐나가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다. 황홀한 색채로부터 예술과 삶의 합일을 그려나간 마리 로랑생 또한 그러한 인물로서 다채로움과 동시에 비움을 지향하면서 고유의 예술을 확립해 나갔다. 따스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고독이 느껴지는 ‘마리 로랑생 展’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마주하고 왔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다.’

-마리 로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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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랑생의 그림에 대한 단상이 전시장을 들어서면서 반겨주었다. 고작 한 문장만 읽었을 뿐인데, 그림에 대한 그녀의 애정 어린 혹은 애증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그림이란 어떤 존재일까. 섹션별로 나눠진 전시장을 거닐면서 그녀의 삶을 걸었고 또 마주할 수 있었다. 맨 처음 마주한 벨에포크 시대와 청춘 시대에서는 무명의 화가로 삶을 살았던 마리 로랑생의 초기 작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그녀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불투명하면서도 공허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를 그려나갔던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서는 피카소의 초상도 볼 수 있었는데, 피카소의 소개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열애시대로 빠져가는 마리 로랑생의 인생을 마주할 수 있다.
 
초창기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어딘가 모르게 신화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으레 신화적이라하면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존재하지 않은(혹은 존재한다고 믿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떠오르기 쉬운데, 로랑생의 그림은 이와는 정 반대의 느낌에서 신화성을 띈다. 그것은 바로 지나치게 비약적이고, 모호한 묘사로 인하여 마치 꿈속에서 마주하는 듯 한 신화의 원형을 가져다 ]준다. 특히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사냥하는 다이애나 여신(Diane a la chase,1908)’에서 신화적인 요소가 짙게 표현되어 있다. 마리 로랑생의 화풍은 삶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따스하고도 평온한 색감을 썼다는데서 그 맥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에 초창기 작품이 다소 신화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시니컬하게 인물을 묘사했다고 하더라도 일생의 예술관의 흐름에서 보면 크게 벗어난 경우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이는 전시장을 걸으면서 마주하는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도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사냥하는 다이애나 여신’은 마리 로랑생의 열애시대와 망명시대를 거치며 ‘마담 앙드레 그루의 초상(1913)’과 ‘다이애나 여신(1921)’ 작품에서 이를 연상케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초창기 사냥하는 다이애나 여신이 조금 더 비장하고 어딘가 모르게 어둠을 연상시킨다면, 후기의 신화적 요소를 담고 있는 두 작품에서는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하지만) 따스함이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주 슬펐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검은 색과 흰색이
주조를 이룬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분홍색과
푸른색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로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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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시기를 기점으로 인간이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철학과 방향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마리 로랑생에게 있어서도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전복되는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로 돌아온 마리가 비로소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게 되는 시기로, 이른바 열광의 시대다. 그녀는 검정과 흰색이 주조를 이루던 자신의 작품에서 파랑과 분홍이라는 따스한 색채의 발견을 시도했다. 이 시기로부터 오늘날 마리 로랑생 하면 자연히 떠오르는 특유의 색채감과 윤곽선을 흐릿하게 그리는 작품적 특징이 탄탄하게 구축되기 시작했다. 전시장에서 이 시대의 작품을 보면 한 눈에 보아도 따스하다는 느낌을 자연히 받을 수 있었는데, 동시에 초기작의 화풍과 비교하였을 때 조금 더 밝아지고 온화해졌다는 사실로도 나아갈 수 있었다. 열광의 시대를 거친 마리 로랑생은 한층 더 강렬해진 색채 속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간다. 예술가임과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말년에 해당하는 성숙의 시대에서 마리 로랑생은 10년에 걸쳐 ‘세 명의 여인들’이란 대작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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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색채로부터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로랑생 역시 지극히 외롭고, 내면에 가닿고 싶었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파스텔톤 색감 속에는 로랑생이 바라본 인간 본연의 직관과 감성이 있고, 꿈이 있다. 검은색과 흰색의 주조를 이루던 시점으로부터 분홍과 파랑을 보기 시작하던 로랑생의 시선의 발견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추운 겨울에 마리 로랑생의 그림으로부터 따스한 위로를 받고 전시장을 나설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느낀다. 그녀의 그림이 감정마저도 메마르게 만드는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까닭은 고난을 이겨내고 다시 따스한 봄을 기다리는 겨울이란 계절의 속성을 많이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미친 듯이 사랑에 빠져보기도, 세상의 불안도 마주하기도하면서 그녀는 내면에 이르는 길을 갈망했고 탐구하며 온전히 예술로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왔다. 그런 그녀의 작품은 여전히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예술이 되어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기에, 그 속에 우울과 고통이 담겨있기에 그녀의 작품은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고 보듬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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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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