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뒤틀린 욕망 속에서 태어난 위대한 희망에 관하여, 위대한 개츠비 [문학]

글 입력 2017.12.2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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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뒤틀린 욕망 속에서 태어난
위대한 희망에 관하여
위대한 개츠비


우리는 개츠비를 이해한다. 1920년대 미국보다 2017년 한국은 '더 화려한 인생'을 부추긴다. 상품처럼 구매된 삶에 익숙한 필자로서는 책의 거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작가가 제목을 붙임으로써 개츠비를 조롱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내용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상류층의 아름다운 여인 데이지를 사랑한 가난한 청년 개츠비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피나는 노력을 통해 부를 쌓아 올린다. 큰 부자가 된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함을 느낀다. 자동차 수리점 주인의 아내인 머틀이 데이지와 함께 돌아가던 차에 치여 죽고, 머틀의 남편 윌슨이 수영장에서 둥둥 떠있던 개츠비를 총살한다. 화려한 파티광으로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던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소설의 서술자인 닉과 몇몇의 집사 뿐이었다. 가난한 청년이었던 개츠비에게 상류층의 우아한 아가씨인 데이지는 연정의 대상 이상이었다. 아름다운 수사를 붙여도 그는 데이지를 자본주의의 ‘소유물로서’ 욕망했고, 부정직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 그녀를 ‘구매’하려고 했다. 데이지의 목소리에서 닉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부분에서는 절로 냉소가 지어졌다. 필자에게는 그것이 자본주의에 물든 인간이 명품으로 전시될 수 밖에 없는 약자, 여성인 데이지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려하는 행태로 보였다. 이런 관점을 유지할 때, <위대한 개츠비>는 자본주의의 비극적인 면모(혹은 아메리칸드림)를 고발하는 소설에 불과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실상 그가 사랑한 것은 상류층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는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데이지의 부유한 삶을 사랑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느낌이 아니라 자본이 가져다주는 환상을 사랑했다. 그런 그가 모든 걸 바쳐 데이지에게 집착하는 것은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판단과 책의 서사는 마지막 장에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책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는 '연애소설' 이었던 책의 장르가 바뀌어 버린 착각이 든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닉이 아무런 감상 없이 개츠비의 장례식장을 지켰다면 필자에게 <위대한 개츠비>는 그저 치정극이나 풍자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개츠비의 집의 나무에서 네덜란드 선원들의 자취를 찾아냈을 때 갑자기 소설은 미국의 역사소설로 탈바꿈하고, 개츠비는 비로소 필자에게도 ‘위대한 인간’이 되었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유럽에서 핍박받던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신대륙으로 나선 사람들이다. 새로운 대륙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끝없는 희망과 개척정신으로 가슴이 뛰었다. 닉은 네덜란드 선원들의 흔적에서 개츠비의 사랑을 떠올렸다. 개츠비의 미소는 네덜란드 선원들을 닮았다. 그 미소는 네덜란드 선원들처럼 희망에 취해 있었고, 희망을 이뤄낼 수 있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닉도 개츠비의 미소는 어떤 영원한 세계를 본 것 같은 사람만이 지은 미소라고 서술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맛보고, 그토록 갈망하고, 갈망하는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기에 그토록 강한 연결고리를 가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결코 1920년대 환락적인 미국사회를 꼬집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미국의 낭만적인 시작, 더 확장하자면,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유와 위대함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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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개츠비에게 처음 내린 판단을 수정할 이유는 없다. 개츠비의 사랑은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서 피어났다. 사랑의 시작은 비순수했고, 그들의 사랑의 진행도 마찬가지여서, 그가 몸 바쳐 사랑했던 상대는 무책임하게 도망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히 개츠비의 사랑을 네덜란드 선원들이 느낀 희망과 같은 위치에 올릴 수 있을까? 과연 상류층 여성에게 갖는 동경 섞인 사랑과 세계를 새로 개척하는 모험심이 함께 놓을 수 있을까? 하지만 필자는 닉이 그러했듯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츠비가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한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모험심과 개츠비의 연정,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를 같이 올려두고 나서야 개츠비의 사랑이 갖는 모순을 알 수 있다. 개츠비를 어떤 무한한 사랑에 이끌어준 것은 데이지지만, 오년 동안 완전히 바뀌어버린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개츠비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없다. 개츠비가 처음 사랑했던 것은 데이지의 상류층 이미지였다. 소설에서 우리는 개츠비가 그녀를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로 묘사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가난한 군인이었던 개츠비에게 아름답고 부유한 아가씨 데이지는 단순히 연인으로서의 여성이 아니었을 것이다. 데이지는 자본주의의 경쟁 속에 내놓아진 상품같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아니라 상품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개츠비의 사랑도 자본주의의 이론과 맞닿아있다. 광고를 접한 우리가 플레인 요구르트라는 단품 하나가 아닌, 그것을 떠먹는 광고 모델의 청량함 또한 구매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다. 데이지는 자본주의의 라푼젤이다. 풍성한 황금빛 자본의 머리카락을 보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홀려 왕자는 자본의 사다리를 넘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개츠비의 사랑은 정말 자본주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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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는 저 멀리에서 빛나는 초록색 빛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초록빛은 데이지였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 이상이 되어간다.
 

개츠비가 위대한 인간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라푼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왕자를 거부했다면, 최소한 그녀가 탑 속의 공주님이 아니었다면, 그 사랑도 끝이 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데이지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사실 개츠비가 영원히 데이지의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재력을 보고 개츠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여기서 개츠비의 사랑이 갖는 모순이 하나 더 발견된다. 데이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허무한 것 처럼 보였다. 사실 그가 한 개체로서의 데이지를 사랑했다면 원하던 것을 얻었음에 무한한 행복을 느껴야했다. 그의 사랑이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데이지는 그에게 삶에 대한 생동감을 일깨웠다. 그의 사랑은 데이지로 인해 유발된다. 하지만 5년 동안의 개츠비는 그녀를 하나의 이상이나 희망으로 둔 탓에, 데이지는 이미 데이지 그 자체를 초월했다. 개츠비에게는 너무나 절대적인 존재기에, 소설에서 드러나는 데이지의 타락은 개츠비에게 아무 상관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데이지를 갖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사실 지상의 어떤 것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5년 후의 그는 이제 너무 거대한 것을 사랑했다.

닉이 글을 시작할 때 언급했듯이, 개츠비는 자본주의의 천박한 특징을 모두 갖춘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냉소적인 닉이, 그에게 그토록 이끌렸던 것은 개츠비가 가진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 혹은 '삶의 가능성을 민감하게 찾아내는 감수성'때문이었다. 그 시작이 다분히 위선적이었을지언정, 그는 그것을 향해 맹렬히 추구하고, 희망하고, 이루어냈다. 그 과정은 분명 네덜란드 선원들이 미국 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마음과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그토록 위선과 브랜드 이미지로 가득 찬 자본주의 구조에서 개츠비가 그토록 순수한 열망을 가진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 거짓투성이 사회 속에서도 누군가는 희망을 꽃피운 것이다. 개츠비라는 인간 자체는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는 학력을 위조했고,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고, 그가 맹렬하게 가지고 있었던 사랑조차 자본주의에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라는 인간을 통해, 작가는 어떤 타락한 시대에 완전히 물든 인간들 사이에서도 피어나는 희망과 그것을 이루려는 인간의 고군분투를 말하려고 했다. 닉 캐러웨이의 마지막 독백은 필자에게 어떤 큰 충격까지 줬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미국의 시작뿐만 아니라 역사의 많은 순간에서 인간의 희망은 빛을 발했다. 우리는 때때로 타락한 현재와 거기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냉소하고 절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의 닉처럼 인간이 가진 어떤 혁명성을 자각하고, 신뢰를 잃지 않는다면, 어떤 타락한 세상에도 결국 개츠비같이 스스로의 세계와 주변세계를 혁명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떤 타락한 세계 또한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것으로 변화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신문을 피면 여기저기서 아픈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미국 1920년대의 자본주의보다 사회에게 목을 졸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닉의 말은 더욱 강하게 우리에게 주장한다. 이런 불안하고 비극적인 삶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발견한다. 어느날 동굴 속에서 가느다랗게 비쳐오는 빛을 발견하고, 너무나 그것을 사랑하고 갈망한 나머지 안락한 동굴에서 기어나와 기어코 그것이 온 세계가 되도록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것은 역사부터 지금까지, 사회의 부패 속에서도 인간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 끊임없이 흘러가면서도 해류에 맞서 배를 띄우고 파도를 가른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대륙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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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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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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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
    • 안녕하세요. 두레 참가 중인 김소원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는지 물어보셨는데 저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는데도 글을 읽으니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충분히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글이 매끄러워서 쉽게 읽히면서도 중간중간 시선을 사로잡는 문장이 눈에 띕니다. 가장 첫문장인 '우리는 개츠비를 이해한다'랑 데이지를 라푼젤에 비유한 부분 같이요. 아무리 암울하고 비참한 상황에서도 한줄기 희망을 찾아내는 게 인간이라니 '어느날 동굴 속에서 가느다랗게 비쳐오는 빛을 발견하고~'부터 끝까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도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대충 알고 있던 터라 왜 '위대한'개츠비일지 가끔 의문을 품곤 했는데 에디터님이 쓰신 글을 읽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게 되었어요.
      내용적인 부분에서는 따로 지적할 부분을 찾기 힘들고 형식적인 부분에서 굳이 한 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마지막 문단이 조금 길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 문단 끝에서 여덟번째 줄 '오늘날 대한민국은~'부터는 다른 문단으로 나눠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가독성도 더 좋아질 것 같고요.
      두레 덕분에 좋은 글을 발견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앞으로의 글쓰기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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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찬규
    • 두레를 통해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위대한 개츠비'는 왜 명작이지 모르겠는 소설이라는 평이 많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저도 처음 읽었을 때 무미건조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고요. 그러기에 이렇게 적어주신 멋진 해석은 충분히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 좋은 가이드라인이 되고, 읽었던 사람에겐 새로운 해석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놓치기 쉬운 네덜란드 선원들이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해석을 이끌어가신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장들도 좋아서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네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더 적자면, 데이지에 대한 무언가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영화 속 데이지의 사진을 올리는 것 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읽다 보면 상류층의, 상품의 상징인 '데이지'뿐만  적힌 있는 그대로의 '데이지'도 만나고 싶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묘사를 통해서  데이지를 향한 열망의 의미가 더 돋보일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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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찬규
    • 2018.01.04 19: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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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
    • 김찬규적고보니 너무 짧아 죄송하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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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
    • 2018.01.05 0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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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
    • 김찬규글 길이만이 감상의 깊이를 보여주지는 않죠. 충분합니다 ㅎㅎ! 충분한 내용과 감상이었습니다. 찬규 에디터님의 피드백 새겨들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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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onnnah
    • 답글이 너무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우선은 진주 에디터님의 글체가 마음에 들어요
      한 번 읽으면 빠져드는 글체같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셨나봐요!
      저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답글을 달기 전 책을 읽지도 않은 제가 피드백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책을 읽지 않았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당장 위대한 개츠비 영화던 책이던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정말 흥미로운 글이었어요 '광고를 접한 우리가 플레인 요구르트라는 단품 하나가 아닌, 그것을 떠먹는 광고 모델의 청량함 또한 구매한다.' 이런 비유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글이 더 쉽게 읽힌다고 해야될까요 조금 더 보충이 필요한 부분은 개츠비에 대한 설명은 많이 나오지만 데이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아쉬웠어요 데이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제가 직접 책을 읽어서 알고싶어집니다 그만큼 빠져드는 글이였어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할게요 에디터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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