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마리 로랑생 - 색채의 황홀 展', 파리의 여자들을 담던 화가의 일대기를 보다.

글 입력 2017.12.1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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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마리 로랑생 - 색채의 황홀 展'
파리의 여자들을 담던 화가의 일대기를 보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나를 영원히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 마리 로랑생 -



마리로랑생포스터-02.jpg
 
 
이번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는
'마리 로랑생 - 색채의 황홀 展'입니다.

전시기간 : 2017년 12월 09일 ~ 2018년 03월 11일
전시장소 :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1층 1-2 전시실
전시내용 : 프랑스의 대표 화가 '마리 로랑생'의 일대기를 담은 전시
그녀의 20대부터 70대까지의 시기를 총망라한다.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는데
나는 기억해야 하는가
기쁨은 늘 괴로움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 오고 종은 울리고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아 있네
(후략)


'마리 로랑생'은 위 시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다. 위 시의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녀와 5년 동안 연애를 했던 연인이었다.

그녀와의 이별로 그는 데이트를 하던 미라보 다리에서 시를 썼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가 되었다. 그런 기욤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다. 그 소식을 들었던 마리는 한 시를 남긴다.


진정제
(한국에서는 '잊혀진 여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마리 로랑생

지리 하다고 하기보다 슬퍼요
슬프다기 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 보다
나홀로.
나 홀로라기 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 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 보다
잊혀졌어요.


남편과의 불화 속, 그녀를 붙잡은 것은 예술이었다.

그녀는 이혼 후 본격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이 잠들어있는 공동 묘지에 잠든 그녀의 손에는 기욤의 편지가 함께였다.

사생아로 태어나 문화예술의 중심에 섰고, 세계 제 1차, 2차 대전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꿋꿋히 본인만의 예술을 해나갔던 프랑스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이던 '벨 에포크'(우리말로 아름다운 시절을 뜻한다.)시대를 대표하던 그 속에서 많은 화가들과 호흡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던 그 시대의 뮤즈로 통한다고 한다. 화가인 동시에 시인이었고, 북 일러스트 작가였으며,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그녀의 직업군만 봐도 그녀가 가진 예술적 재능은 감춰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색채 활용은 세계 미술사에서 마크 샤갈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만의, 그녀가 활용한 독특한 색채들은 지금까지 남아 많은 이들의 뇌리에 박혀있게 되었다.


키스, 1927년경, 캔버스에 유채, 81.2x65.1, Musee Marie Laurencin.jpg
키스, 1927년경, 캔버스에 유채
81.2x65.1, Musee Marie Laurencin

세명의 젊은 여인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97.3x131, Musee Marie Laurencin.jpg
 세명의 젊은 여인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97.3x131, Musee Marie Laurencin





마리 로랑생은 작품에 대해 지적인 관념을 대입하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녀는 오롯이 본능과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는 화가였다. 아름답고 젊은 여성들과 형체가 모호한 동물들이 풀밭에 들어찬 몽환적인 세계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끊임없이 담아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의 환상과 직관을 갖지 못했다면, 마리 로랑생은 입체파나 다다이즘의 추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조지스 블라크, 앙리 루소 등 야수파와 큐비즘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이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낸 여성 화가라는 점에서 마리 로랑생이 서양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적지 않다. 마리 로랑생은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바라봤던 서양미술사의 흐름에서 탈피해 여자의 눈으로 응시한 그들의 모습과 여성성을 포착해낸 최초의 여성 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의 삶은 역사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격렬한 삶을 살았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결혼과 이혼, 이혼 후 오로지 작가로서의 삶까지, 그리고 영원한 연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까지 말이다.

그녀의 화가로서의 커리어는 20대부터 70대까지 이어졌고, 격동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본인만의 것을 지키는 예술가였다. 당시 입체파, 야수파 등 남성 위주의 화단 속에서도 그녀는 꿋꿋이 본인이 하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작가들의 뮤즈가 될 정도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를 그녀는 계속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내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더 있었더라면!" 이라고 외쳤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의 삶에서 예술, 그림은 본연 자체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위대성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은 그녀 사후, 30년 후다. 그녀는 당시 본인의 여성성을 전혀 숨기거나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그것이 그녀의 장점이자 약점이었을거라 말한다.

격동의 시기, 남성위주의 화단, 전쟁이라는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중심에서 자신만의 그림을 외친 화가 마리 로랑생은 이번 전시로 찾아왔다. 사실, 이번 문화초대가 아니었다면 앞으로 마주치지 못했을 수 있다. 이번 전시가 한국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라고 하니 말이다.

이번 전시로 그녀의 그림과 마주하며 모르고 지나쳤던 그녀의 삶,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색채에 매혹될 것이라고 믿는다. 폭력성이 강조되던 시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당시 여성의 관점으로, 그녀가 어떤 그림으로 풀어냈을지 심히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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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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