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1) 마리 로랑생展 [회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글 입력 2017.11.2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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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랑생展
- 색채의 황홀 -


마리로랑생포스터-01.jpg



피카소와 샤넬을 그린
황홀한 색채의 화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마리 로랑생 첫 국내 특별전 개최






<기획 노트>


1.jpg
70세, '세명의 젊은 여인들'을 제작중, 1953



이 시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위대한 여성 화가이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작가 마리 로랑생(1883~1956)은 1, 2차 세계대전의 틈바구니에서 황홀한 색채와 직관을 통해 여자와 소녀, 꽃과 동물 등을 그려냄으로써 세상의 아픔을 보듬고자 했다.

파블로 피카소, 코코 샤넬, 장 콕토, 알베르 카뮈 등 수 많은 예술가와 교류하며 '몽마르트르의 뮤즈', '핑크 레이디'로 불렸던 그녀는 1910~1930년대 프랑스 파리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예술가의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런 작가의 작품들은 100여 년 전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이며 작가가 평생에 걸쳐 체득한 '색채의 연금술'은 여전히 미묘하고 신비롭다.

국내 최초로 열리는 이번 특별전은 160점에 달하는 작가의 유화, 수채화, 삽화, 사진 등을 통해 마리 로랑생의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야수파와 입체파의 틈바구니와 남성 위주의 화단에서 여성 작가로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던 마리 로랑생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쓴 한국인의 애송시 '미라보다리'의 주인공을 넘어 독립적이고 위대한 예술가로 우리 곁을 찾아온다.

총 5개 섹션으로 구분된 이번 전시는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던 1900년대 초반부터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한 1950년대까지 작가의 전 시기를 망라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아울러 코코 샤넬과 헬레나 루빈스타인 등의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렸고 북 디자인과 실내 장식, 발레 의상에까지 영역을 넓혔던 마리 로랑생의 예술세계가 패션 및 뷰티, 그리고 상업 디자인 전반에 걸쳐 끼친 영향을 다양한 각도와 오브제를 통해 재조명하는 전시가 될 것이다.





<전시 맛보기>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전시회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20대 무명작가이던 시절부터 대가로서 73세의 나이로 죽기 며칠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시절까지의 전 시기의 작품을 작가의 인생을 따라 추적해가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마리 로랑생의 사진을 소개하는 도입부를 지나 1부 '청춘시대' 섹션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화가 브라크와 함께 파리의 아카데미 앙베르에 다녔던 시절 그렸던 풍경화와 정물화, 자신의 초상화와 피카소의 초상화 등이 소개된다.


자화상, 1905년경, 목판에 유채, 40x30, Musée Marie Laurencin.jpg
자화상, 1905년경, 목판에 유채
40x30, Musée Marie Laurencin


파블로 피카소, 1908년경, 캔버스에 유채, 41.4x33.3, Musée Marie Laurencin.jpg
파블로 피카소, 1908년경, 캔버스에 유채
41.4x33.3, Musée Marie Laurencin


2부 '열애시대'에서는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의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들이 공개된다. 3부 '망명시대'에서는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급하게 독일인 남작과 결혼하지만, 신혼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스페인으로 망명 생활을 떠나게 된 작가의 고통과 비애, 외로움이 드러나며 자신만의 색깔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게 되는 작품들이 선보인다.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 1913, 캔버스에 유채, 112x144, Musée Marie Laurencin.jpg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 1913
캔버스에 유채, 112x144, Musée Marie Laurencin
 

성(城)안에서의 생활, 1925, 캔버스에 유채, 114.4x162.3, Musée Marie Laurencin.jpg
성(城)안에서의 생활, 1925, 캔버스에 유채
114.4x162.3, Musée Marie Laurencin


4부 '광란시대'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 남편과 이혼한 뒤 마음의 고향이었던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알리게 된 시기의 유화 작품들이 소개된다. 특히 4부에서는 1924년 마리 로랑생이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해 큰 성공을 거둔 발레 '암사슴들'의 에칭 시리즈도 소개된다. 제5부에서는 북 일러스트 작가로도 활동했던 작가의 성취를 살펴볼 수 있는 38점의 수채화 및 일러스트 작품이 전시된다. 작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대표 실존주의 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사랑의 시도'를 비롯해 오페라로 더 잘 알려진 알렉산더 뒤마의 '춘희',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등의 북 커버 또는 책 안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다.


꽃과 비둘기, 193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x125, Musée Marie Laurencin.jpg
꽃과 비둘기, 193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x125, Musée Marie Laurencin


세명의 젊은 여인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97.3x131, Musée Marie Laurencin.jpg
세명의 젊은 여인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97.3x131, Musée Marie Laurencin
 

전시장에는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시를 담은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을 비롯해 마리 로랑생이 1942년 출간한 시집 겸 수필집 '밤의 수첩' 등을 통해 시를 직접 필사해보고 시 낭송을 감상해보는 '밤의 수첩' 코너가 전시의 다양한 즐거움을 배가할 예정이다.





마리 로랑생展
- 색채의 황홀 -


일자 : 2017.12.09(토) ~ 2018.03.11(일)

*
1월 29일(월), 2월 26일(월) 휴관

시간
오전 11시 ~ 오후 7시
(입장마감 오후 6시 30분)

*
3월 : 오전 11시 - 오후 8시
(입장마감: 오후 7시)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티켓가격
성인 13,000원
청소년 10,000원
어린이 8,000원

주최
예술의전당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KBS

주관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KBS미디어

관람연령
전체관람가




문의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02-396-3588





마리 로랑생의 인생 이야기


33세무렵, 마드리드에서, 1916.jpg
33세무렵, 마드리드에서, 1916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했던 예술가 마리 로랑생의 생애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로 시작되는 천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名詩) '미라보 다리'의 실제 주인공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화가 이다. 화가인 동시에 시인이며 북 일러스트 작가이기도 했고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로도 활약했던 그녀는 세계 미술사에서 마크 샤갈과 더불어 색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가로 손꼽힌다. 그녀는 무엇보다 색채에 대한 자신만의 매혹적인 감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홀한 핑크와 옅은 블루, 청록색, 우수가 감도는 회색 등은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보면 누구나 한 번에 알 수 있는 것들로 만들어주었다.

마리 로랑생은 작품에 대해 지적인 관념을 대입하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녀는 오롯이 본능과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는 화가였다. 아름답고 젊은 여성들과 형체가 모호한 동물들이 풀밭에 들어찬 몽환적인 세계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끊임없이 담아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의 환상과 직관을 갖지 못했다면, 마리 로랑생은 입체파나 다다이즘의 추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조지스 블라크, 앙리 루소 등 야수파와 큐비즘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이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낸 여성 화가라는 점에서 마리 로랑생이 서양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적지 않다. 마리 로랑생은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바라봤던 서양미술사의 흐름에서 탈피해 여자의 눈으로 응시한 그들의 모습과 여성성을 포착해낸 최초의 여성 화가라고도 할 수 있다.

아울러 마리 로랑생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평화와 번영이 계속되며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던 파리의 시기를 지칭하는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예술가의 예술가'라 불리기도 한다. 우리말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을 담은 이 시기와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마리 로랑생은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물론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마리아 릴케, 코코 샤넬, 헬레나 루빈스타인, 서머셋 몸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 시작은 피카소가 가난한 무명작가이던 시절, 몽마르트르의 허름한 건물 바토 라부아르(세탁선)에서부터 시작됐다. 화가 브라크의 소개로 젊은 작가들의 아지트이던 이곳을 드나들던 스무 살의 마리 로랑생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묘한 매력을 발산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가 됐다. 피카소의 소개로 훗날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는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들은 모두 사생아였고 이는 둘 사이의 묘한 동질감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리와 사랑에 빠진 아폴리네르는 "마리 로랑생의 예술은 우리 시대의 명예이다."라는 헌사를 바치며 마리의 작품 세계를 알리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5년간의 짧은 사랑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게 되면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죽음 속에서 마리 로랑생은 독일 귀족 출신의 화가로 연하였던 오토 폰 바예첸 남작과 결혼을 감행하고 만다. 1912년 '파리의 야회'지(誌) 2월호에 기욤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를 발표하며 실연의 아픔과 상실감을 드러냈다. 이 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가 되는데, 5년간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던 화가 마리 로랑생(1885~1956)과의 결별을 아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는 세계적인 샹송 가수인 이베뜨 지로(Yvette Giraud)와 음유시인 레오 페레(leo Ferre) 등이 불러 불후의 명곡이 됐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로 즐겨 불린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미라보다리' 중에서)


마리 로랑생 또한 아폴리네르가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얻은 부상으로 사망하자 그를 그리며 시를 쓴다. '밤의 수첩'에 수록된 이 시는 한국에는 '잊혀진 여인'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원래 제목은 '진정제'이다.


지리 하다고 하기보다 슬퍼요
슬프다기 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 보다
나홀로.
나 홀로라기 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 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 보다
잊혀졌어요.


마리 로랑생이 헤어진 연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그리며 이 같은 시를 썼을 때 그녀는 1차 세계대전을 피해 독일인 남편 오토와 스페인으로 유랑하던 시절이었다. 결혼 후 불과 1개월 만에 터진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인 남편과 프랑스인 부인의 신혼생활에는 재앙과도 같았다. 독일과 프랑스 어디에도 돌아갈 수 없었던 마리 부부는 스페인을 도피처 삼아 부유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여기에 남편 오토의 알코올 중독과 방탕한 생활은 마리의 정신 상태를 극한으로 내몬다. 이때 그녀를 구원한 것은 오로지 그림과 문학이었다. 남편 오토와의 이혼 이후 1920년대 장 콕토를 비롯한 프랑스 예술가들의 탄원을 통해 프랑스 국적을 회복하고 파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마리 로랑생은 비로소 자신의 예술 세계를 꽃피우게 된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녀는 예술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의상과 무대 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넘쳐났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악화된 건강과 사회적인 고립으로 인해서 마리 로랑생의 작품은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50년대 그녀의 작품은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으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 작가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죽기 며칠 전까지 "내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하곤 할 정도로 예술혼을 불태웠던 위대한 예술가였다. 1956년 6월 8일 일요일 밤, 심장 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된다. 한 손에는 흰 색 장미를 다른 한 손에는 운명적 사랑을 나눴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받은 편지 다발을 든 채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 이 여성화가의 위대성이 몇몇 평론가들에 의해 서서히 드러나는 전기를 맞이했다. 마리 로랑생은 자신의 여성성을 감추거나 남성 화가들과 대항하기 위해 왜곡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프랑스의 비평가 다니엘 마르세이유는 이것이 이 화가의 위대함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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