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리나 사포즈니코바에 반했던, 백조의 호수

글 입력 2017.11.1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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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궁전, 가지각색의, 하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갖춰 입은 젊은 남녀들의 춤사위, 풍요롭고 우아함이 베어나는 왕실 귀족들, 부드럽고 깊이 있는 오케스트라의 선율. 붉은 색 장막이 걷히고 난 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발 디딘 세상과는 전혀 딴 판인 세계였다. 무대 위 발레 무용수들은 책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춤을 추었다.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프리모스키 스테이지)가 보여준 <백조의 호수>는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이 균형있게 어우러진 동화였다. 진부하지만, 그보다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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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표현


 <백조의 호수>엔 ‘백조’라든가, ‘백조가 사람으로’ 변하는 것과 같이 무대 위에서 재현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요소들이 분명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은 오데트와 오딜을 한 명의 발레리나가 연기하는 세계 유일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희귀성은 곧 표현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백조의 호수>에는 백조인 오데트와 흑조인 오딜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물들을 이번 공연에서는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백조가 호수 위를 헤엄치는 모습을 위 아래로 반사시켜 실제 물에 비친 것처럼 보여주었고, 무도회장 창밖에서 지그프리트 왕자와 오딜이 무도회를 즐기는 것을 보며 괴로워하는 오데트를 창문에 영상으로 등장시켰다. 열기로 가득찬 무도회장은 따뜻하게, 백조와 왕자가 배회하고 또 사랑을 나누는 호숫가는 푸르게 비춤으로써 무대를 보다 생동감 있게 해주었고, 아련하고 쓸쓸한 <백조의 호수>만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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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 사포즈니코바 with 세르게이 우마넥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프리모스키 스테이지) <백조의 호수>에서는 오데트와 오딜을 수석 무용수 한 사람이 모두 맡는다. <백조의 호수> 라고 하면 지그프리트 왕자보다도 ‘백조만큼이나 아름다운’ 오데트가 떠오를 정도로 스토리 속에서 여자 주인공의 역할이 굉장하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발레단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프리모 발레리나가, 그것도 정 반대의 위치에 있는 흑조까지 선보인다고 하니, 프리뷰를 쓸 때부터 오데트가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 줄곧 기대감에 차있었다.


Swan Lake by G Shishkin Soloists -  세르게이, 이리나1.jpg
 

 오데트/오딜 역에는 마린스키 극장의 수석 무용수인 빅토리아 테레시키나와 마린스키 프리모스키 스테이지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인 이리나 사포즈니코바가 더블 캐스팅 되어있었다. 내가 보았던 공연은 이리나 사포즈니코바가 연기했는데, 그녀는 단연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레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기술에 대한 평가는 힘들지만, 표현력에 있어서만큼은 이제껏 접해왔던 ‘무용’만으로 이루어진 공연들 중에 최고였다. 어딘지 연약하고 아슬아슬한 오데트를 연기할 땐 솔직히 연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만 있으면 풀썩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을 보며 무식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혼자 독무를 선보여야 해서 힘든가보다 했다. 하지만 오딜을 보고서야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 추측이었는가를 깨달았다. 이리나 사포즈니코바는 그저 검정색 의상으로 갈아입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손끝의 움직임과 모든 동작에서 강렬함과 에너지가 느껴졌다. 여기에 그녀의 관능적이고 치명적인 표정이 덧입혀지면서 오데트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오딜만이 남았던 것이다. 3시간에 걸친 공연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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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교를 통해 대상을 평가한다. 나 역시 그런 대다수 중의 하나다. 원작과 원작을 각색한 연극을 비교하고, 같은 연극이라도 배우가 다를 때 어떤 차이점이 발생하는지를 분석하며, 비슷한 소재의 두 영화를 두고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다고 늘어놓는다. 하지만 가끔은 비교가 불필요할 때가 있다. 자체만 놓고 봐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때 그렇다. 이번 <백조의 호수>는 앞으로 어떤 발레공연을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늘 하나의 기준으로, 기억으로, 마음 속에 따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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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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